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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 스트리트

제33회 황룡학술문학상 문학부분 당선(소설)

- 32분 걸림 -

두 대의 공중전화는 모두 먹통이었다. 잔돈을 연달아 집어넣었으나 기계를 작동시키는 묵직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빈 바닥으로 곧장 떨어지며 쇠붙이끼리 부딪히는 소리만 났다. 동전을 투입하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옆 칸은 안내 음성은 고사하고 잡음만 들렸다. 반환 버튼을 눌렀으나 동전은 나오지 않았다. 공연히 잔돈만 버렸다. 나는 손목을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여섯시 사십삼 분. 약속시간까지 한 시간쯤 남았다.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 사이에 붙여놓은 포스트잇을 뜯어 ‘수리 요망’ 종이를 두 전화기에 붙였다.

여기서 Y시 번화가까지는 걸어서 이십여 분 정도 걸렸다.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회사를 빠져나온 보람이 있었다. 평소처럼 엉덩이를 들썩이며 머뭇거렸다면 한두 시간 정도는 더 잡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이런 일까지 벌어졌다면 어쩔 줄 모르고 식은땀만 뻘뻘 흘리며 우왕좌왕했을 게 분명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먹통이 되어버린 휴대전화를 주머니에서 찾아들었다. 문자메시지함을 열어보려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바탕 화면에서 어디로도 들어가지지 않았다. 맨 위쪽 상태 표시줄에 열지 않은 편지봉투 모양이 보였다. 막 정과 구체적인 약속 장소를 정하고 있던 차였다. 시간과 지역을 얘기한 것은 나였으니 이제 정이 어느 건물에서 만날지 얘기할 차례였다. 혹시나 싶어 공중전화의 수화기를 한 번 더 들어보았다. 신호가 걸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번화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가다가 전화를 보면 이동통신회사에 연락을 할 계획이었다. 휴대전화만 원상복귀 된다면 약속시간까지 넉넉히 맞춰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주 오는 이들에게 전화를 빌릴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길바닥에 사람을 잡아두는 것도 실례였다. 통신 회사처럼 사람들이 꾸준히 연락을 취하는 기업들과의 통화는 한 번에 연결된 적이 없었고 대기시간도 길었다. 게다가 날이 갑작스럽게 추워져서인지 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몇 사람이 반대쪽에서 걸어오기는 했으나 몸을 잔뜩 웅크리고 서둘러 걷는 모양새가 여간 살벌한 게 아니었다. 정을 만나 얘기가 잘 진행된다면, 이직을 하기 전에 동남아 쪽으로 휴가를 다녀올 예정이었다. 입사를 한 후, 한 번도 제대로 된 휴가를 갖지 못했다.

지금의 회사에서는 주말을 챙기는 것도 어려웠다. 본래 휴대전화용 문서프로그램을 개발하는데 초점을 둔 소규모 벤처기업이었으나 요새에는 꼭 문서편집 뿐 아니라 게임이나 이미 시장에 나와 있던 컴퓨터 프로그램들을 휴대전화에 맞게 재창작하기도 했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이쪽저쪽 잡다하게 뛰어들다 보니 당연히 손이 모자랐다. 디자인을 담당하는 내가 소프트웨어 쪽에 붙어 일을 처리한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수당을 더 쳐주는 것도 아니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이런 아이티 기업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다보니 제대로 단가를 맞추기가 힘들었다. 항상 야근에 주말까지 끼어 일하다보니 팀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누구 하나가 일이 생겨 그 날 잔업에서 빠지게 되면 다들 표정이 굳었다.

두어 달 전부터 식도염에 시달리다가 근래 들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서둘러 일어난 적이 있었다. 그게 이주일 정도 되었다. 밤마다 계속 이어지는 회식도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빠졌다. 그러나 그 일들이 화근이 될 줄은 몰랐다. 여태껏 같이 점심을 먹던 동료들이 저들끼리만 나가는 탓에 며칠 동안은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 먹었다. 일은 계속 내 쪽으로만 쏟아졌다. 일손이 필요해 나보다 문서를 잘 다루는 후배에게 업무를 넘기면 담당이 아니라며 제 일만으로도 벅차다고 손을 내저었다. 일을 제때 맞추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고 상사의 잔소리도 갈수록 심해졌다. 매일 세끼마다 약을 먹었으나 병의 차도는 없었다. 오히려 속이 더 쓰려왔다. 이러다 정말 드러누울 것 같아 대학동기에게 괜찮은 회사를 알아봐 달라고 사정했다. 동기의 고교선배인 정에게 연락이 온 것은 나흘 전이었고, 포트폴리오며 이력서들을 보낸 뒤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온 것은 어제였다. 어렵사리 마련한 자리였다. 어느 정도 수준만 맞춰준다면 당장이라도 계약할 의향이 있었다.

와인봉투가 무릎께에 자꾸만 부딪쳐 왔다. 정에게 선물할 목적으로 준비한 포도주였다. 정의 요청에 따라 메일로 보냈던 포트폴리오도 챙겨 담았다. 묵직한 봉투가 계속 다리에 걸렸다. 줄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길게 늘어났다. 포트폴리오를 서류가방에 넣고 와인봉투를 안아들었다 족히 오백 미터는 걸었다. 건너편으로도 공중전화는 보이지 않았다. 전화기를 살 형편이 되지 않는 이들은 갑작스럽게 변경된 약속들을 어떻게 해결하는 지 의문이었다. Y시에서 거리의 모든 공중전화들을 수거해 간 것 같았다. 휴대전화는 여전히 먹통이었다. 일곱 시 오 분. 맞은편으로 번화가가 보였다.

다행히 입구 쪽에 공중전화 세대가 줄지어 위치해있었다. 신호도 제대로 갔다. 가게마다 흘러나오는 노래와 지나다니는 사람들로 인해 주위가 시끄러웠으나 일단 전화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먼저 전화번호안내 센터에 연락을 하여 정의 회사 번호를 적었다. 곧바로 연결을 시도했으나 끝없이 신호만 이어졌다. 모두들 퇴근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두 번 더 전화를 걸었으나 마찬가지였다. 정의 개인 전화로 연락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휴대전화를 고치기 위해 통신회사로 연락했다. 여자의 기계적인 음성이 대기 시간을 알렸다. 대기시간은 이 분 이상입니다. 흘긋 뒤를 바라보니 내 뒤로 선 사람은 없었다. 옆 칸도 빈 채였다. 다들 저마다 하나의 전화기를 손에 쥐고 걸어가고 걸어 다녔다. 마음 놓고 통화를 해도 될 것 같았다. 어쩐지 Y시에서 공중전화를 모두 수거해버린 이유가 납득이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무슨 용무로 전화 주셨습니까?”

수화기 너머 억지로 솔 음계까지 끌어올린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계처럼 정확하고 막힘이 없었다. 나는 사정을 설명했다. 그녀는 내 말이 끝날 때마다 적절한 호응을 곁들이며 경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꾸준히 알려왔다.

“그러십니까, 고객님. 많이 불편 하셨겠어요. 현재 고객님께서 ○○이동통신을 사용하고 계십니까? 본인 확인을 위해 주민 번호 열세 자리를 불러주시겠습니까?”

나는 뒤를 흘끔 살피고 수화기를 손으로 가린 채 조그맣게 숫자를 불렀다. 본인 확인이 완료되자 상대편에서 담당 기사와 연결을 시켜주겠노라며 회선을 돌렸다. 마찬가지로 내 몫으로 대기 시간이 얼마쯤 더 주어졌다. 몇 분 쯤 지나자 겨우 기사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어떤 문제 때문에 전화 주셨습니까? 본인 확인을 위해 주민 번호 열세 자리를 알려주시겠습니까?”

다시 한 번 주민등록번호를 읊었다. 기사는 내가 내 휴대전화의 주인이 맞는지 거듭 확인했다.

“혹시 휴대전화를 껐다 켜보셨습니까?”

전화가 멈추고 나서 서너 번 정도 종료버튼을 눌러봐도 상태는 그대로였다. 그 말을 전했으나 기사는 다시 한 번 전원을 꺼보기를 요청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사의 말을 따랐지만 휴대전화는 여전히 먹통이었다. 이번에는 전원을 껐다 켜는 대신 단말기 뒤편에 부착된 유심 카드를 꺼냈다가 재삽입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기사가 하라는 대로 고분고분 움직였다. 기사와의 통화가 길어졌다. 수중의 동전도 서서히 떨어져 갔다.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괜히 시간낭비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초조했다. 기사는 반복해서 같은 행위를 명령했다. 내가 ‘이미 다 해보았고 그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더라.’ 라는 말들을 계속 읊자 기사는 점차 퉁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는 시계를 살폈다. 일곱 시 이십삼 분. 이 번화가 어딘가에서 정을 보기로 한 시각은 여덟시였다. 판단을 내려야 했다. 아무래도 이 기사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보였다. 내 휴대 전화는 보기보다 문제가 심각해 보였다. 전화상으로는 해결 될 것 같지 않아 기사에게 Y시 번화가 근처에 서비스 센터가 있느냐고 물었다. 수화기 너머 두어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더니 기사가 건물 위치를 말로 풀어주었다. 다행히도 바로 이 부근이었다. 십분도 걸리지 않을 거리였다.

기사의 말에 따르면 서비스센터는 여덟시까지 영업을 한다고 했다. 일을 보고 서둘러 돌아온다면 정을 제 시간에 만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다시 한 번 정의 회사 쪽으로 연락을 해보았으나 연결은 되지 않았다. 별다른 수가 없었다. 나는 길가로 나와 손을 들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 택시를 탈 생각이었다. 노란색의 낡은 승용차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가 의자 밑에 가득 떨어진 쓰레기들을 보고 주춤 물러났다. 다른 택시를 잡을까 망설였으나 겨우 십분 거리였다. 뒷좌석에 올라탔다. 택시기사는 머리가 허옇게 새고 그 흰 머리털마저 얼마 남지 않은 늙은 사내였다. 나는 서비스 센터가 위치한 빌딩을 얘기했다.

“기사님, 이 근처에 금영빌딩 아세요? S회사 서비스 센터가 있는 곳이요. 바로 이 근처라는데…….”

“금영빌딩이라……. 오거리 쪽 말하는 건가?”

택시는 이차 선으로 끼어들었다. 그는 척 보아도 늙었고 휴대전화 따위는 아무것도 모를 것 같았다. 그런데도 과감히 깜빡이를 켜고 좌회전 신호를 받았다. 올바르게 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더욱 불안해졌다. 점점 시계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고객센터에서 일러준 위치와도 맞지 않았다. 택시기사가 몸을 앞으로 잔뜩 기울이고 빌딩들을 올려보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를 제지했다.

“기사님, 내비 찍고 가시면 안 될까요?”

택시 기사는 화면 꺼진 내비게이션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코너를 돌았다. 얼마간 직진을 하다가 차선을 바꿔 길가에 차를 세웠다. 내비게이션은 전원이 아예 뽑혀있었다. 택시기사는 느긋한 손짓으로 선을 연결했다. 전원이 켜지는 데만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가 자음과 모음을 더듬거리며 누르는 동안에도 미터기는 깜빡거리며 숫자를 올렸다.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택시기사의 느린 손가락을 보고 있으니 속이 얹힌 듯 갑갑했다. 기사를 밀쳐내고 대신 주소를 입력해주고 싶었다. 차에서 나는 냄새도 역했다. 나는 창문을 살짝 내렸다. 그 때 안내를 시작하겠다는 내비게이션의 음성이 들렸다. 화면에 표시된 위치를 보니 반대방향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멀지 않은 거리였다. 택시기사는 그 짧은 거리를 가는데도 온 신호마다 멈춰 섰다. 아직 빨간 불로 바뀌지도 않았는데 속도를 줄였다. 나는 부러 창문을 손으로 두들겨댔다. 일종의 신호였는데도 그는 백미러로 흘깃 나를 한 번 바라봤을 뿐, 여전히 느린 속도로 앞 차와의 안전거리를 지켰다.

차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나는 서둘러 내렸다. 차라리 뛰어왔다면 이만큼 시간이 지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건물로 뛰어가 안내판을 찾았다. 칠층 꼭대기에 서비스센터가 보였다.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두 개 중 하나는 점검중이라는 붉은 불이 깜박였다. 다른 하나는 막 일층에서 천천히 위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시계를 계속 보았다. 일곱 시 사십오 분. 아무리 애를 써도 몇 분 정도는 늦을 것이다.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중요한 약속에 늦는 건 경우가 아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차가 더 밀려서 정 역시 늦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아니면 가벼운 접촉사고가 일어났다던가, 혹은 도로를 공사하고 있다던가 하는 문제들이 정 앞에 일어나기를 바랐다. 막 수리를 마치고 뛰어가는 나에게 정이 얼마쯤 더 늦을 것 같다고 연락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마침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칠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느리게 올라갔다. 삼층에서 멈춰서더니 젊은 여자가 올라탔다. 그녀는 육층을 눌렀다. 나는 대충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서둘러 움직이느라 옷차림이 흐트러진 것 같았다. 그녀가 내리자마자 닫힘 버튼을 눌렀다. 문은 느리게 움직였다. 차라리 걸어 올라가는 것이 빠를 뻔했다. 엘리베이터는 한 칸 더 올라 꼭대기 층에 멈췄다. 문이 열렸다. 맞은편으로 비상계단이 보였다. 조명이 드문드문 꺼져 있어서 복도는 어두웠다. 혹 영업시간이 끝난 것은 아닐까 싶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여덟시까지 십여 분이 남았다. 그러나 제대로 영업을 하고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쓰레기봉투가 나와 있었고 책상이며 종이박스까지 마구잡이로 널려있었다. 당황스러웠으나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 그것들을 헤치며 나아갔다. S회사 서비스센터 안내판이 꺾인 복도를 가리켰다. 코너를 돌았다. 굳게 닫힌 철문이 드러났다.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문이 낡은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찬바람이 열린 틈으로 거세게 몰아쳤다. 공사가 진행 중인 터널 형식의 구조물 위로 ‘하늘정원’ 엘이디 간판이 비뚜름하게 붙어있었다.

복도의 쓰레기더미 틈에서 ‘내부 이전’ 이라는 커다란 글씨와 간단한 약도가 그려진 종이를 발견했다. 그것을 주워들어 안내판 위에 제대로 붙여주었다. 혹시라도 나와 같은 불행한 일을 당할 이들을 위해 무어라도 해주고 싶었다. 새로 이사한 가게는 신시가지 쪽으로 여기서 신호 하나 걸리지 않고 가더라도 삼십 분이 소요되는 곳이었다. S회사 서비스 센터는 Y시에 몇 개 되지 않았다. 번화가 쪽이니 하나 정도는 있을 것이라 여겼으나 이전을 했을 줄은 몰랐다. 다시 일층으로 내려와 건물을 나왔다. 시내 쪽으로 돌아가는 길은 차가 밀렸다. 걷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번화가로 돌아가 공중전화에서 정의 회사로라도 연락을 해야 했다. 나는 잠깐 망연해져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정의 회사는 확실히 자유로운 분위기인 듯 했다. 고작 여덟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전화를 받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대학동기에게 정의 번호를 묻고 싶었으나 난 그가 다니는 회사의 대표 이름만 알 뿐 어느 계열사이고 또 그 지사가 어디에 붙어있는지, 그가 어떤 부서의 어느 직책을 담당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심지어 휴대번호의 뒷자리가 3이라는 것만 기억날 뿐이었다. 사실 그것도 분명치 않았다. 나는 공중전화 부스 안에 쪼그려 앉았다. 번화가에 카페는 몇 개나 될까. 설마 나와 함께 밥을 먹으러 가지는 않을 것이다. 번화가에 있는 카페를 뒤지고 다니면 그 중 하나에서 정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의 사정을 설명하고 와인이라도 건네준다면, 나를 안타깝게 여기고 생각이라도 한 번 더 해줄지 모른다. 머릿속으로 오늘의 일을 차근차근 정리해보았다. 모든 것은 휴대전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작은 기계하나가 나를 여기까지 몰아넣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미리 선물이라도 사둔 것이었다.

내내 가방과 봉투가 들려있었던 왼손을 그러쥐었다. 손이 가벼웠다. 무게가 줄었다. 확인해보니 와인 봉투만 들려있었다. 포트폴리오며 지갑이며 서류들을 담은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주위를 살폈다. 공중전화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좀 전에 이곳을 떠날 때에도 가방을 분명 챙겨들었다. 택시를 잡아 탈 때까지만 해도 손에 있었다. 서비스 센터에서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는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았다. 다시, 택시를 탄 순간부터 떠올려보았다. 내비게이션을 켜고 장소를 입력한 다음, 다섯 개의 신호를 기다리다가 도착하기 직전에 차비를 주었다. 시계가 사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너무 조급한 나머지 거스름돈도 받아들지 않았다. 목적지에 이르러 서둘러 문을 열었다. 그리고 차가 완전히 멈춰서기도 전에…….

Y시 종합 택시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 신호가 갔다. 곧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여보세요? 아니, 택시를 부르려는 게 아니라, 네. 오늘 일곱 시 사십 분 경에 번화가 앞에서 택시를 탔는데 가방을 놓고 내린 것 같아서요. 지갑이랑 책 같은 게 들어있어요. 혹시 찾을 수 있을까요? 저는 지금 탔던 그 자리에 있어요. 번화가 앞이요. 서점 쪽에. 네? 아니요, 제가 지금 전화기가 안돼서요. 그냥 여기 서점에 맡겨주시면 안될까요? 그게 아주 중요한 건데…….”

여자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내 가방을 찾는 일에 관심이 없어보였다. 게다가 택시기사가 이미 지갑을 꺼내 돈만 갖고 나머지는 버렸을 지도 몰랐다. 택시에 뭘 두고 내리면 찾기도 어려울뿐더러 혹 연락이 닿더라도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나는 주머니를 뒤졌다. 천 원짜리 지폐 세 장이 전부였다. 택시 기사가 보상금을 요구한다면 그 자리에서 포도주라도 팔아버려야 할 참이었다. 품에서 휴대전화를 찾아 들었다. 전원버튼을 길게 눌렀다. 여전히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하필 왜 오늘이어야 했을까. 어제나 하다못해 내일 고장 났더라면 이렇게 허겁지겁 뛰어다닐 일도 없었을 테고, 가방을 잃어버리지도 않았을 테고 정을 제 시간에 만날 수 있었을 텐데. 하다못해 번호를 외워 두기만 했더라도 이런 일에 진땀을 흘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손바닥만 한 기계 하나 때문에 하루가 꼬여 버렸다. 나는 분명 제 시간보다 이르게 약속장소 근처까지 왔건만 휴대전화가 망가지는 동시에 모두와 단절되어 버리고 그 주변만 얼쩡거리고 있는 셈이었다. 전자통신망에 접속하지 못하고 현실 세계에만 덩그러니 존재하는 것은 허깨비나 마찬가지였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숨이 가빴다. 여덟시 사십분을 막 지났다. 어디에서도 정은 보이지 않았다. 이 근방의 카페는 모두 찾아다녔다. 서점도 돌아다녔다. 그러나 역시 정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서점에 들러 확인을 했으나 그 택시기사마저 감감무소식이었다. 운전기사가 내 지갑을 들고 갔으니 집에 돌아갈 택시비도 없었다. 아무 곳에나 드러눕고 싶은 심정이었다. 벤치나 정류장에서도 곤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이상 정을 찾으러 다녀봤자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기는 글렀다. 나는 꼼짝없이 지금의 회사를 더 다녀야 할 처지가 되었다. 오늘 정시에 퇴근한 일을 빌미로 더욱 눈총을 받게 될 터였다. 어렵사리 마련한 자리였는데 모든 게 다 틀어졌다.

와인은 전보다 더 무거웠다. 걸을 때마다 무릎에 부딪치며 텅텅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것을 들고 버스 정류소를 찾아 헤맸다. 집으로 한 번에 가는 것을 찾아야 했다. 이따금씩 습관적으로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버스 노선을 찾기 위해, 시간을 보기 위해, 새로 온 메시지가 없나 확인하기 위해. 되지도 않는 휴대전화를 꺼내들 때마다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어디에도 닿지 못했다. 이역만리 이국땅에 홀로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발을 질질 끌며 앞으로 나아갔다. 다리가 납처럼 무거웠다. 온종일 싸구려 구두를 신고 뛰어다닌 탓에 발바닥이 아팠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어서 학생들 틈에 섞여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았다. 라면 냄새가 진동을 했다. 두툼한 외투를 껴입은 학생들이 막 젓가락을 들어 올려 면발을 후후 불어댔다. 그 모습을 보자니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주머니를 몽땅 뒤져 백 원까지 털어냈다. 차비로 쓸 돈을 남겨놓고 나니 겨우 김밥 하나 사 먹을 돈이었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편의점 김밥들 중 가장 싼 하나를 골라 계산대에서 값을 치렀다.

편의점 안쪽 구석에 빈자리가 있었다. 길 쪽으로 난 유리창을 바라보고 앉아 신발을 벗었다. 양말에 생긴 커다란 구멍으로 양쪽 엄지발가락이 툭 불거져 나왔다. 나는 발바닥을 주물렀다. 옆쪽에 앉은 젊은 여자들이 나를 힐끔거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발을 주물럭거렸다. 그 손으로 김밥도 집어 한 입 가득 베어 물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봉투가 보였다. 와인을 꺼내 한 손으로 잡아 올렸다. 제법 묵직했다. 병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필기체로 갈겨쓴 상표명을 더듬더듬 엉터리로 읽어보았다. 생전에 이런 고급와인을 사게 될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병 입구 쪽에는 코르크마개가 완고한 모습으로 버티고 서 있었다. 손으로 튀어나온 부분을 꽉 쥐고 힘껏 당겨보았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어금니로 앙 물고서 병을 반대쪽으로 밀었다. 순간 병이 밀려나가며 꺼끌꺼끌한 파편이 씹혔다. 한 움큼 베어 먹은 코르크 마개가 어림없다는 듯이 꿈쩍도 않고 제자리를 지켰다.

나는 신발도 신지 않고 구멍 난 양말로 바닥을 밟고 일어섰다. 일회용 병따개가 한쪽에 비치되어 있었다. 주머니를 뒤져 남은 돈을 꺼냈다. 차비가 전부였다. 나는 어떤 결의도 없이 홀린 사람처럼 병따개를 집어 들어 계산대로 갔다. 값을 치르고 자리로 돌아왔다. 코르크에 심을 단단히 박아 넣고 시계방향으로 돌렸다. 코일이 천천히 마개를 파고들었다. 병따개를 쥔 손이 허옇게 변할 정도로 힘을 꽉 쥐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마개가 뽑혀 나왔다. 알코올 향과 진한 과육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나는 병째로 와인을 들어올렸다. 들큼한 포도주가 목을 타고 흘렀다. 와이셔츠가 보랏빛으로 젖어들었다. 병 너머로 흘끗 보이는 거리는 컴컴했다. 모두들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빠르게 거리를 지나갔다. 도대체 다들 누구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일까.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 걸까.

나는 전화기를 꺼내 움켜쥐었다. 이 작은 것에 모든 게 들어있었다니. 컴컴한 화면을 들어 나를 비췄다. 이 사이에 이물질이 끼었는지 확인했다. 측면의 전원버튼을 살짝 누르자 화면이 켜졌다. 상태 표시줄에는 여전히 열어보지 않은 편지 봉투 모양이 그려있었다. 나는 무심코 기계를 분리해 배터리를 빼냈다. 유심 카드도 다시 재 삽입했다. 분리한 순서대로 다시 끼워 넣고 별 기대 없이 전원을 켰다. 그 순간 경쾌한 소리가 짤막하게 울렸다. 메시지가 왔을 때 나는 알림 음이었다. 그 소리가 되풀이해서 들렸다. 나는 휴대 전화를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흡사 죽은 사람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정으로부터 새로운 문자가 다섯 개나 와 있었다. Y번화가 어느 카페에서 보자는 내용의 문자가 하나, 아침에 급히 출장을 갔다가 생각보다 일이 늦게 끝나 약속 시간에 삼십 분 정도 늦겠다는 내용도 하나 있었다. 그 뒤로는 나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들이었다. 그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두 차례 신호가 간 뒤 그가 받았다. 나는 오늘의 사정을 차분히 설명했다. 그는 별로 불쾌해하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이 약속 시간을 맞춰 갔더라면 얼굴을 볼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정과 다음 약속 시간을 잡고, 구체적인 장소까지 서로 간에 확실히 일러두었다.

정과 통화를 종료하고 나는 그 자리에 붙박은 듯 가만히 앉아있었다. 뒤통수가 얼얼했다.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았다. 문득 버스 노선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택시기사가 떠올랐다. 가방을 찾아야 했다. 다시 지역번호를 누르고 전화번호 안내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택시 회사에 연결을 시도했다. 전에 통화를 했던 여자가 인상착의를 바탕으로 나를 태웠던 기사의 번호를 알려주었다. 나는 번호를 중얼거리며 외우다가 다이얼을 눌렀다.

택시기사는 내 전화를 피하지도 않았고 보상금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심드렁한 어투로 이미 가방을 가져다 두었노라고 얘기했다. 서점의 폐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 옆 식당에 맡겼다고 말했다. 그 기사는 내게 정신을 똑바로 챙기고 다니라며 충고까지 곁들였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으나 그는 내 말이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나는 포도주를 반이나 남겨두고 편의점을 홀연히 나왔다. 구두를 곱쳐 신고 터덜터덜 서점 쪽으로 걸었다. 막 내부를 청소하고 있는 식당으로 들어가 가방을 전해 받았다. 그 안에 든 포트폴리오며 서류들, 지갑의 지폐들도 그대로 들어있었다. 열어보지도 않은 것 같았다. 나는 가방을 손에 끼고 차도 쪽으로 나왔다. 택시를 잡았다.

차는 막힘없이 번화가 외곽으로 나아갔다. 신호도 몇 번 걸리지 않았다. 며칠 새 바람이 차게 불어서인지 단풍이 인도 쪽에 수북이 쌓여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를 계속 조물 거렸다. 뒷면이 뜨거웠다. 꺼내들어 한손에 꽉 잡아 보기도 했다. 손에 쏙 들어왔다. 화면을 켜고 연락처를 살폈다. 총 백 오십 개의 번호가 이름순으로 나열돼있었다. 열 한자리를 모두 외운 번호는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들로부터 문자가 몇 통 왔다. 대부분 먹고 살기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인터넷을 들어가 새로 나온 기사들을 살폈다. 고속도로 추돌사고로 열 두 명이 죽었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추위가 시작된다. 평년보다 빠른 겨울 한파로 인해 전기난방 수요가 급증하여 전력대란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잠시 멈춰있던 세상이 빠르게 돌아갔다. 나는 오늘 일어난 사건 사고들을 살피다가 화면을 껐다. 다시 조용해졌다. 휴대전화를 한 손에 들고 무게를 가늠해보았다. 묵직했다. 손목이 점점 꺾일 정도로 계속 무거워졌다. 나는 전화를 의자에 내던졌다. 차창 너머 익숙한 동네가 보였다. 지갑을 꺼내들었다. 지폐를 들고 차가 멈추길 기다렸다. 택시 기사는 불을 켜고 돈을 건네받았다. 잔돈을 거슬러주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손님, 전화기 챙기셔야죠.”

그는 잔돈과 함께 내 휴대전화를 주워 건넸다. 잠시 멈칫거리다가 전화기를 받아들었다. 동전들과 함께 주머니에 넣었다. 한쪽 주머니가 무거웠다. 점점 옆으로 몸이 기울었다. 걸음이 비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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