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어와 현실음
수퇘지[수퇘지]? 숫돼지[숟뙈지]? 수돼지[수돼지]?
말에는 입말과 글말이 있다. 한국어의 입말을 통일하려 한 것이 표준어라면, 입말인 표준어를 글로 적는 법을 규정한 것이 한글 맞춤법이다. 표준어는 현대 서울의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말을 사정의 원칙으로 삼았다. 입말 중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불규칙하게 변하는 것들이 흔하다. 불규칙하게 바뀐 입말의 한 예로 ‘수-/숳-/숫-’이 있다. 이 형태들은 암수의 구별이 있는 동물의 수컷이나 수꽃만 피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식물을 가리키는 접두사이다. 예전에는 자립성이 있는 명사로 쓰였으며 그 형태는 ‘숳’ 하나였다. 예전에는 ‘ㅎ’을 말음으로 가진 명사가 꽤 있었는데, 현대어에 이르러 이들 명사의 ‘ㅎ’ 말음은 모두 없어졌다. ‘숳’의 경우 말음 ‘ㅎ’이 없어지면서 발음도 대체로 ‘[수]’로 변하게 되었다([ ] 안은 발음을 표기한 것이다). 다만 몇몇 복합어의 발음에 ‘ㅎ’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결과적으로 ‘수컷’의 의미를 담고 있는 현대어 복합어들은 불규칙한 세 가지의 발음을 보이게 되었다. 복합어 ‘수캐[수캐]’의 경우에는 ‘ㅎ’의 자취가 남아 있어 뒤의 음절 ‘[개]’가 거센소리 ‘[캐]’로 발음된다. 복합어 ‘수나비[수나비], 수나사[수나사], 수나무[수나무]’ 등에서는 ‘ㅎ’이 없어진 ‘[수]’로 발음된다. 그리고 ‘숫양[순냥<-숟+양]’에서는 사이시옷 비슷한 소리로 발음된다.
복합어에 포함된 형태소 ‘수’가 세 가지 발음 중 어떤 소리로 나는지는 규칙화할 수 없다. 사람들의 발음도 제각각이다. ‘돼지의 수컷’을 뜻하는 복합어를 ‘[수퇘지]’로 발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숟뙈지]’로 발음하는 사람도 있다. ‘수꽃만 피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은행나무’를 뜻하는 복합어를 ‘[수은행나무]’로 발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든행나무]’로 발음하는 사람도 있다.
표준어는 언어의 통일성을 지향한다. 하나의 단어가 불규칙하게 여러 가지로 소리 나는 것을 통일할 필요가 있다. ‘수-/숳-/숫-’의 포함된 복합어의 경우, 현행 표준어에서는 세 가지 발음 중 되도록이면 ‘수-[수]’로 통일하여 불규칙성을 최소화하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하여 ‘숳-’과 ‘숫-’ 형태의 복합어는 예외로 몇 개만 인정하고 나머지 복합어는 모두 ‘수-’로 통일했다.
예외로 인정되는 ‘숳-’ 복합어는 아홉 개이다.
(1) 수캉아지, 수캐, 수컷, 수키와, 수탉, 수탕나귀, 수톨쩌귀, 수퇘지, 수평아리
예외로 인정되는 ‘숫-’ 복합어는 아래 세 개뿐이다.
(2) 숫양, 숫염소, 숫쥐
이들 (1), (2)의 복합어만 빼고는 모두 ‘수-’로 통일한 것이다. 불규칙성과 혼란을 줄이려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러나 ‘수-’로의 통일이 과연 현실음을 반영한 결과인지는 의심스럽다. 현실음이란 표준어 사정의 기준이 되는 ‘현대 서울의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말’을 가리킨다. 현재 표준어로 되어 있는 아래의 단어는 특히나 현실음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3) 수놈[수놈], 수소[수소](소의 수컷), 수사자[수사자]
(4) 수개미[수개미], 수거미[수거미], 수벌[수벌]
많은 사람들이 (3)의 단어들을 ‘[순놈]’, ‘[숟쏘]’, ‘[숟싸자]’로 발음하고(이 발음이 표준어라면 맞춤법은 ‘숫놈’, ‘숫소’, ‘숫사자’가 된다.), (4)의 단어들은 ‘[수캐미]’, ‘[수커미]’, ‘[수펄]’로 발음한다(이 발음이 표준어라면 맞춤법은 ‘수캐미’, ‘수커미’, ‘수펄’이 된다.). 표준어를 정할 때 하나의 발음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원칙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널리 쓰이는 현실 발음을 더 중시해야 한다. 새롭게 표준어를 정할 때에는 현실음이 충실히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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