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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

제33회 황룡학술문학상 학술부문 가작

- 13분 걸림 -

설국열차

Freedom is not free

미국 워싱턴의 한국전쟁기념관에는 Freedom is not free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는데 그 옆엔 판초 우의를 입고 긴장과 공포, 걱정 등의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국전쟁 참전 미군의 동상이 자리 잡고 있다.

사진으로나마 그들을 접한 필자로서는 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그들의 신념을 용감무쌍한 호걸의 모습이 아닌 그저 연고라고는 전혀 없는 타국에 파병 나와 죽음을 담은 총탄이 언제 자신의 군번줄로 향할지를 두려워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으로 표현했다는 것에 큰 감명을 받았는데 그들의 모습을 보며 필자는 자유라는 것이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만큼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실제로 필자는 군인 생활 중 몇 번의 실제상황을 겪어봤는데 그중 제일은 김정일의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이 북한 방송국을 통해 발표가 되고 몇 시간 되지 않아 점심시간 직후 국방부는 국지전 경계태세 2호를 발령하였는데 그와 동시에 필자는 식곤증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급하게 총과 방탄모 등의 개인장구를 착용하고 담당하는 방공무기에 들어가서 무전기 헬멧을 통해 무전을 들으며 명령을 기다렸다. 사실 그렇게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것을 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와 북한의 관계는 썩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그전부터 연평도를 포격하는 등의 이상 징후를 보였던 터라 필자는 이번엔 정말 전쟁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며 그로 인해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가 몸과 마음을 점령하였다. 이후 수십 년 같은 수십 분이 지나고 나서야 어둠에서 나와 생활관 침대로 돌아온 필자는 포탄을 쏟아낼 폭격기를 상대로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후 학창시절 싸움 한 번 해본 적 없던 필자를 무장한 적을 상대하는 군인으로 바꾸어 놓은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 한참 동안 생각해본 결과 ‘필자의 뒤에 있는 가족’과 ‘상관의 명령’, ‘그냥 주위 군인들 모두 그렇게 하니까….’와 같은 이유 사이에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어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친구에게 속아 팥 양갱을 들고 영화관에 가서 매표소의 직원으로부터 설국열차의 표를 받는 순간 약간 설렘이 필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전에 이미 ‘설국열차’는 그 캐스팅과 스케일, 감독 등의 이유로 필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었는데 결과적으로 설국열차는 그러한 기대만큼 큰 충격과 메시지로 보답했다.

영화의 외면적인 부분에선 열차 속의 계층과 정수시설, 교육시설, 가축 사육시설, 수족관, 스파, 의료시설 등이 있는 설정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 팔을 절단하는 공개처벌을 포함한 열차 속의 정치적 상황, 실제로 조명 없이 횃불만을 이용한 터널 속 액션장면, 콘스탄틴과 나니아 시리즈에서 매혹적인 타락천사이자 마녀인 틸다 스윈턴의 변신과 송 강호와 고 아성이라는 한국배우의 등장이 필자의 눈을 즐겁게 하였다면 그 사이사이 숨겨진 메시지는 봉준호의 이름에 자연스럽게 이끌리어 살인의 추억을 시작으로 괴물, 마더를 지나 설국열차의 내면적 부분에 골고루 섞여 있어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히 이러한 메시지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빛을 발하는데 언덕에서 나타난 북극곰의 모습은 여운을 떠나 필자가 크레딧이 끌까지 올라갈 때까지 비어있는 팝콘 통의 밑바닥을 훑으며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사실 이러한 봉 준호 감독의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관객들을 향해 던지는 것이 어제, 오늘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필자의 경우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장면에서 범인을 찾아 관객을 바라보는 ‘박 두만 형사’(송 강호)의 눈빛은 개봉 10년째인 지금까지도 소름이 끼치며 ‘괴물’에서 ‘강 두’(송 강호)와 그의 양아들로 보이는 아이가 자신들에 관한 뉴스가 나옴에도 식사를 위해 TV를 꺼버리는 장면은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데 이번 설국열차 역시 마지막 메시지는 ‘봉 준호 영화’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장면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열차가 폭발한 뒤 탈선하게 되고 살아남은 남궁민수의 딸인 요나와 타냐의 아들은 열차 밖인데도 불구하고 모자를 벗는다. 그들은 어딘가를 응시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이 처음 세상에 발을 내딛는 것에 대한 충격인지 아니면 실제로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때쯤 언덕 너머로 북극곰이 등장한다.

이는 실로 수많은 내용을 암시하는데 첫째로 바깥세상이 모자를 벗어도 될 만큼 춥지는 않다는 뜻이며 언덕 너머로부터 다가온 북극곰은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는 포유류로써 먹이사슬의 하위계급에 속하는 중, 소형 육식동물부터 그들의 먹이가 되는 초식동물과 식물까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영화 후반에 열차 속의 자유를 찾아 엔진실로 향해 결국 그 문 앞에 다다른 커티스(크리스 에번스)에게 남궁민수(송강호)가 말한 남궁민수만의 자유, 곧 커티스가 엔진 실에 이르러서도 결코 발견하지 못한 진정한 자유가 열차 밖에 실존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필자가 가장 인상 깊게 느꼈던 것 중 하나는 그들이 싸워온 결실이 그들의 손이 아닌 그들 자녀의 손에 쥐어진다는 점에 있다. 이는 소름 끼치도록 현실에서의 자유와 비슷한 모습으로 비추어지기도 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세계와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선 자유를 위해 싸우며 엔진실을 향해 달려왔던 수많은 사람이 존재했다. 프랑스 혁명을 포함한 수많은 서양의 혁명과 우리나라의 수많은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었던 그들은 총과 칼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그로인해 그들은 싸움의 이유였던 눈 덮인 언덕 너머에서의 자유를 보지 못하였다.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자유를 마주한 사람들은 남궁민수의 딸이며 타냐의 어린 아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의 그들과 마찬가지로 윌포드는 독재와 폭력, 억압과 교육을 통해 진정한 자유로의 발걸음을 차단하고 있었다. 공개적인 형벌로 하급 계층의 승객들을 위협하였고 중간 계층의 승객들에게는 반란을 일으킨 자들의 말로를 보여주며 열차 밖은 곧 죽음이라는 것을 교육하며 세뇌해왔다. 상급계층에게는 크로놀이란 마약과 ‘열차 안에서는 특권층’이라는 특권의식을 심어놓아 열차 밖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차단하였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자유를 향한 도전의 시작은 영화 밖의 세상에서의 수많은 도전이 그러했듯 가장 하급계층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조금씩 전진함에 따라 열차 기관실에서는 그 심각성을 깨닫고 둔기를 든 진압대를 파견하고 그것이 뚫리자 나중엔 얼마 남지 않은 총알을 써버린다. 그것마저도 뚫리고 커티스 일행이 엔진 실 근처에 이르렀을 때 크로놀에 빠져 있던 특권계층은 자신들의 특권을 뺏으러 온 자들을 향해 대항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는 완벽하게 현실에서의 투쟁의 모습과 일치한다. 그리고 그 일치성을 위해 영화는 중요한 하나를 요소를 잊지 않는다. 그것은 필자가 이 영화를 통해 가장 크게 느낀 점이며 이 논평을 통해 전달하려는 중점적 메시지이기도 하다.

즉, freedom은 free가 아니라는 것이다. 객실 한량을 넘을 때마다 무혈입성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전투에 전투를 거듭하며 처음에 수십 명에 이르던 커티스 일행은 끝에 이르러선 단 세 명이 살아남게 된다. 커티스는 총리인 메이슨(틸다 스윈턴)을 잡기 위해 자신의 동생인 에드가(제이미 벨)를 적의 손에 내어주고 만다. 그럴 뿐만 아니라 보안담당자인 남궁민수의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서 크로놀을 줘야했고 남궁민수는 마지막 관문을 앞두고 ‘백인’ 커티스와는 달리 엔진 실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총에 맞는다. 타냐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커티스는 손목을 잃었고 무엇보다 열차 밖에서의 자유를 위해 그들은 열차는 폭발시키고 이후 열차는 탈선한다.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를 잃어야만 했고 그럴싸하게 포장된 자유를 위해서는 하급 계층 수십 명과 그들을 막던 진압대원들이 죽은 것에 비해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는 열차 전체, 즉 이전 세상 전부가 파괴되었고 고대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결국 그들의 2세만 가나안에 입성하였던 것처럼 진정한 자유를 마주한 것은 반란과 싸움에 목숨 걸었던 이들이 아닌 그들의 자녀, 그것도 단 두 명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아쉬운 원칙이 아닐 수 없다. 자유가 공짜라면 역사책 속에서 비극이 차지하는 분량은 훨씬 줄었을 것이고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 사라지지 않았어도 될 모든 것들이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설국보다 더 냉혹하여 다른 건 몰라도 자유만큼은 피 흘리지 않고서는 얻어내기 힘든 것이 오늘날 까지도 점차 늘어나고 있는 역사책의 비극 페이지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감독의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분명한 것은 자유를 얻기 위한 대가는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나오는 설산은 컴퓨터 그래픽이 아닌 실제 오스트리아의 산악지방에서 촬영하였다고 한다. 필자는 너무나도 멋있는 장면이라 헐리웃의 뛰어난 CG기술의 작품이라 착각할 정도였는데, 이토록 멋있는 장관을 마지막 장면의 배경으로 한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것을 영화가 주는 마지막 메시지로 해석하는데 필자의 해석은 이러하다. 설산의 아름다움은 자유의 가치를 의미한다. 수많은 사람이 피흘리고 요나와 타냐의 아들에게 있어선 세상의 전부였던 열차를 폭파시키면서까지 얻어내려 했던 자유, 즉 freedom은 결코 free가 아니기에 무언가를 지불해야 하지만 분명히 그것이 아깝지 않을 만큼의 충분한 값어치가 있다는 것이다. 어찌 본다면 감독은 이전 세대가 이루어낸 세상 속에서 자유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는 세대들에게 있어 자유의 대가보다는 그 가치를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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