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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믿어도 좋은가

노력하지 않는 운명과, 노력하는 운명

유지혜 기자
- 4분 걸림 -

작년 9월에 개봉한 ‘관상’이라는 영화를 우연히 티비에서 보게 되었다. 영화의 첫 시작은 거센 눈발이 휘날리는 어느 저택의 모습이다. 보이지 않는 두려움에 덜덜 떨며 칼을 쥐고 집 밖으로 나가는 어느 양반의 모습이 사뭇 기괴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이 양반이 이렇게 공포에 떨었던 이유는 한 남자의 ‘관상을 보는 눈’이 자신을 ‘목이 잘릴 상’, 즉 목이 잘려 죽을 운명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 양반은 과연 자신에게 내려진 운명을 믿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러한 운명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1623년, 평안감사로 재직한 적이 있던 박엽(朴燁)은 어느 날 한 외국인 주술사에게 “사람 일만을 죽여야 살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너는 죽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겁에 질린 박엽은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사소한 잘못과 죄를 가진 사람들을 모두 사형시키게 된다. 마침 조정에서는 정권을 틀어쥔 김자점이 반대파였던 박엽의 혹독한 형벌 집행을 문제 삼아 사형시키기로 결정한다. 그 때, 김자점이 스스로 이름 대신에 쓰던 자(字)가 바로, 일만(一萬)이라는 이름이었다고 한다. 만약 박엽이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사형시키지 않고, 다른 대책을 강구했다면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운명을 피하려다 더욱 앞당기게 된 것이다.

사실 운명에 관해 따지자면 끝도, 해답도 없다. 만약 누군가 ‘운명’에 대해 깊게 파헤치고 싶어도 그것을 알아내지 못하는 것이 그의 운명이라면 그는 평생에 걸쳐 쓸모없는 짓을 한 셈이 되는 것이다. 운명에 갇힌 사람이 어떻게 운명에 대해 논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운명에 대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저 양반을 보고 그 일을 자초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자신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안락하게 개척하기 위한 사람들에게는 이 운명론적 생각들이 방해만 될 뿐이다. 그들에게 자신이 한 만큼 그 대가를 얻고, 나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당연하고도 행복한 일인가.

또한 사람은 모두 독자적 존재이다. 이렇게 독자적인 존재들이 모두 개개인의 운명을 갖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어느 상황에서든 변수는 발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변수는 하나의 갈래였던 길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운명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다양한 길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운명이라면 믿어도 좋다. 그것을 향해 노력하는 것도 굉장히 좋은 일이다. 타로카드로 점을 쳐 봤든, 관상을 봤든 이것들은 모두 우리가 앞으로 가게 될 길이 아니라 더욱 나은 길을 향한 잠깐의 이정표일 뿐이다. 나쁜 운명이라면 그것을 발판삼아 더욱 노력하자. 노력만으로는 안 된다는 소리를 자주 듣더라도 좌절할 필요는 없다. 노력으로 안 된다면 무엇으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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