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성을 지닌 노력 속에서만 새로운 차원의 삶을 열 수 있다
얼마 전 처제의 아이들이 집에 놀러온 적이 있었다. 봄이라지만 유난히 바람 끝이 매서운 날들이 계속되다 오랜만에 바람 없는 그야말로 따스하고 포근한 봄날이었다. 그래서인지 많은 나이 차 탓에 평소 서로 다른 방법으로 이모네 집에서 각자의 휴일을 보내는 아이들이었는데, 그날따라 뭐가 신났는지 집 마당과 뒷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모처럼의 낮잠에 취한 내 귓전에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가 봄햇볕 속에서 아련히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일껏 따뜻한 봄날, 낮잠에 취해서는 안된다고, 텃밭에 심어야 할 얼룩콩과 이런저런 씨앗, 시들어가는 고추 모종들이 밭 한켠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자각이 내 가물거리는 의식을 간신히 흔들어 깨웠는데, 문득 애들이 거실 바닥에 어지럽게 던져놓고 간 옷가지들 속에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제목은 <점과 선>.
책의 줄거리는 단순했다.'너는 시작이고 끝이요, 모든 것의 중추이며 골자로구나’라고 감탄하며 자주빛 점에게 빠져버린 한 직선과 이런 직선은 본체만체 쾌활하고 자유로운 헝클이(헝클어져 있는 곡선)에게 빠져버린 점의 어긋난 사랑 이야기. 직선이 ‘난 믿음직하고, 난 내 갈 길을 알고 있고, 나는 위엄이 있다’라고 아무리 외쳐대도 점의 사랑은 그럴수록 헝클이에게만 향할 뿐’. 자기 안의 열정을 표현하고 싶어진 직선은 열심히 멋대가리 없이 단순한 일직선일 뿐인 자신을 변화하려 애를 쓰는데, 커다란 집중력과 자제력으로 드디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방향을 바꾸고 구부릴 수 있게 된다. 직선은 최초로 ‘각’의 모습을 갖게 되었고 다시 구부리고 구부리는 것을 계속하면서 갖가지 평면도형과 입체도형으로 변모할 수 있게 된다. 결국 타원과 원과 복잡한 곡선들의 모습을 거쳐 드디어 무슨 모양으로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눈부시고 아름답고 능란하게, 복합적이고 심오하게’. 점은 무질서한 헝클이에게 미래가 없음을 깨닫고 결국 이 매력적인 직선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된다.
음, 결국은 해피엔딩이군…… 자유란 무질서의 허용이 아니라며 규칙을 더해 갖가지 형상을 만들어가는 직선의 아름다움에 한편 감탄하면서도, 결국은 끊임없는 노력만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고 사랑도 얻을 수 있다는 진부하고 도식적인 스토리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책을 덮으려는 찰나, 마지막 페이지의 문장이 내 눈길을 잡았다. 교훈 :벡터, 즉 일정한 방향이 있는 힘이라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저 맹목적인 노력이 아닌, 방향성을 지닌 노력 속에서만 새로운 차원의 삶을 열 수 있다는 교훈은 내가, 우리가 그저 양적인 노력만을 강조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들게 했다. 물론 무작정 열심히 가다보면 자연스레 길이 생길 수도 있지만 방향을 정하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덜 힘들고 방황의 시간을 줄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선뜻 책을 덮지 못하는 내 머릿속에 교정의 낯익은 젊은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이 멋대가리 없는 직선에서 다각형으로, 입체도형으로, 화려하고 기하학적이며 심오한 문양으로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것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솟아올라 내 마음을 가득 채운다. ‘직선’으로 땅에 꽂히는 봄 햇살이 땅을 파헤쳐 갖가지 모양의 무수한 생명체를 길어 올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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