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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은 슬프다

김의한 선임기자
- 4분 걸림 -

 변명은 슬프다
권경인

오래 병들어 푹푹 썩어버린
지상의 작은 방 한 칸을 버리고
눈비 오는 동안 조용히 길을 물어 한천에 닿다
너무 또렷하여 빛 한 점 내비치지 않는
마음의 원시림
누추하고 귀한 것들이 제 속의 숨은 보석을 끌고
산을 올라간다
다스릴 것 하도 많아서 길은 끝이 없는데
제 그림자 하나로 넉넉히 차운 밤 밝히고도
어둠은 스스로를 어찌하려는 것인지
제 안에 수많은 새들을 기른다
단 한 번의 비상을 꿈꾸어 전생애를 탕진하고도
가장 힘든 길은 언제나 내 안에 있으니
한꺼번에 마음의 가지를 터는 일이란 얼마나 혹독한 것인가
말이란 할수록 많아지는 법
할 말이 많아서 차라리 아무 말도 못할 때
그는 말한다
오를수록 먼 길이 있으니
지금 깨어있는 자 영원히 깨어 있으리라
이 골짜기 저 능선
바람의 길에도 도가 있으니
무릇 생명 있는 것들의 고통 속에서도 길이 있으리라

공중에서 끊임없이 몸을 바꾸는 잠언 몇 줄기
깨어진 영혼의 아픈 틈을 메우듯
군더더기란 그런 것이다

등산을 좋아하는 분들은 다 경험하는 일이지만, 산을 오르내릴 때 우리는 대개 묵묵히 제 발끝을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등산은 아무리 여러 사람과 함께 해도 결국 혼자 걷는 길인 셈입니다. 이처럼 산을 오르며, 삶의 의미나 방향을 곰곰 되새기는 이 시는 다소 추상적이고 관념적입니다. 하지만 시는 다 이해되지 않아도 좋습니다. 한번 읽어서 다 이해되는 시는 어쩌면 바로 그만큼만의 깊이만 갖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작품 속에서 화자는 지상의 방을 버리고 산을 올라 드디어 ‘한천’에 닿습니다. 썩고 병든 지상의 방이란 세상에서의 힘들고 고단한 삶을 의미하겠지요. 그리고 한천은 추운 겨울 하늘일 텐데, 아마 산 정상에 오르면 하늘과 맞닿은 듯 여겨질 테니 그렇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산을 오르면서 화자는 세상의 온갖 삶의 길에 대해 곰곰 자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내면에 다스릴 것 하도 많아서 길은 끝이 없다는 것도 알고, 가장 힘든 길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는 사실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 문제는 그렇게 다 알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변명을 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지요. 과연 “말이란 할수록 많아지는 법”입니다. 또한 너무 할 말이 많아서 차라리 아무 말도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마침내 아픈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세상을 향해 할 말이 많은 것은 결국 삶의 변명이며 군더더기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가령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일기장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변명하고 합리화하지요. 그것을 겸허히 인정할 때, 우리는 이 작품의 제목에서 말하는 「변명은 슬프다」의 의미를 깨우치게 됩니다. 우리를 가라앉히고 우리를 정화시키는 힘은 바로 그러한 내면의 모색이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구구한 변명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변명은 과연 언제나 슬픈 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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