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대부분 상식적인 수준에서 독서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독서의 중요성을 아는 것과 각 개인이 독서를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책 읽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그에 따른 다양한 활동은 지속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따라서 영국, 호주, 일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도 ‘독서의 해’를 지정하여 이것이 일회성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손쉽게 독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독서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미 우리나라는 2006년도에 '독서문화진흥법'을 제정, 공포한 바 있다. 국민들의 독서 문화 진흥을 위한 정책 추진의 법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이 법이 제정되면서, 우리는 독서를 개인이나 학교 교육의 차원이 아닌 국가나 사회적 차원에서 의무적으로 추진하여야 할 정책 과제로 바라보게 되었다. 현대 사회는 지식 정보화 사회로 인적 자원이 중요한 국가 자산으로 인정받는 시대다. 이러한 현실에서 국민의 독서력 강화를 위한 국가적 노력이 더욱 절실할 때에 우리나라의 '2012 독서의 해' 선포는 국가적인 차원에선 노력의 한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독서의 해를 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의 독서 능력에 큰 파장을 일으키진 못했다. 즉, 독서의 해가 지정되었다고 해서 책을 안 읽던 사람들이 갑자기 책을 읽는 행동을 하는 등의 실천으론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2012년에 독서의 해가 제정된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독서하는 인간이 우리의 본질적 규정은 아니다. 오랜 인류의 역사에 견주어 보면 독서는 아주 최근에야 가능해진 일이다. 일단 문자의 발명 자체가 5천년의 역사밖에 갖고 있지 않다. 문자로 무얼 기록하기 시작한 역사시대는 그 이전의 선사시대와 비교하더라도 극히 짧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이 짧은 기간은 우리의 뇌가 책을 읽기에 적합한 구조와 능력을 갖게끔 진화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책을 읽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독서는 후천적 능력이며, 다른 용도로 진화된 뇌의 부위들이 서로 협조한 결과이다. 하지만 이러한 독서를 함으로써 얻게 되는 다양한 가치는 사람들이 독서를 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는 것을 인식시켜 준다.
독서는 특히 아이들의 뇌 발달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상상력을 관장하는 뇌 부위가 전두전야인데, 책을 읽으면 상상력을 자극하고, 상상력이 자극되면 전두전야가 발달한다. 즉 책을 많이 읽으면 이 전두전야가 훈련되어 상상력이 우수한 아이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독서의 가치를 다른 매체와 비교해서 보면 텔레비전과 같은 영상물은 뇌파 활동을 이완시키고 고도의 정신 활동을 담당하는 전두엽의 발달을 저해한다고 알려져 있다.
독서는 위와 같이 논리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개인의 즐거움을 충족시켜 줄 수 있다. 사람들은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해 혹은 심심해서 시간을 보내려고 그리고 단지 책을 좋아해서 독서를 하는 등의 다양한 목적으로 독서를 한다. 이렇듯 독서는 독자에게 앎의 즐거움, 깨달음의 즐거움, 감동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독서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개인의 즐거움은 우리 사회를 감성적이고 아름답게 구성하는 원천이 된다. 앎의 즐거움은 책에 담긴 지식을 발견할 때 느끼는 즐거움이고, 깨달음의 즐거움은 그런 앎을 통해 삶의 지혜를 얻을 때 느끼는 즐거움이며, 감동의 즐거움은 앞의 두 즐거움을 기대하는 설렘에서 오는 즐거움이다. 이런 즐거움이 개인의 인지와 정서의 극적인 발달을 이끌어 준다는 점에서 독서가 우리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개인의 취미 중에 독서가 포함되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 있고 그걸 읽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얻게 되는 부가가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2005년 청각 장애인 학교인 현재 광주 인화 학교에서 발생한 성추행 사건을 소설로 만든 작가 공지영의 작품 ‘도가니’는 책으로 출판되었을 당시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이 영화라는 매체로 제작, 상영되면서 ‘도가니 법’이 제정될 정도로 사회적인 파장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인권단체와 국가적인 지도에도 변화가 없던 장애인의 인권에 대한 문제가 대대적으로 국가의 이슈가 되었다. 작가의 소설 작품으로도 사회적 이슈를 만들지 못했지만 영화의 상영으로 인해 엄청난 반향이 일어난 것이다. 공지영 작가가 ‘도가니’를 저술하면서 대한민국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영화 작품 한편으로 공지영 작가의 의도가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내용은 책이 아닌 영화의 위력을 보여주는 사례이지만 도가니라는 영화가 대중들에게 보여질 수 있었던 시초는 공지영 작가의 소설인 책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애초에 책이 없고 독서를 할 수 없는 사회였다면 지금의 정보화 시대가 가능했을까? 사람들의 지식 체계와 정보의 원천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책을 통해 교육을 배우고, 교양을 쌓기 때문이다. 독서의 가치는 개인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의 시야를 ‘독서하는 인간’에서 ‘독서하는 사회’로 확장해본다면 우리는 독서라는 프리즘으로 인간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볼 수도 있다. 그 역사는 ‘책을 읽는 자’와 ‘읽지 못하는 자’라는 범주에 의해 구획된 역사다.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책을 읽는 계급이 읽지 못하는 계급을 지배해온 역사다. 일제 강점기만 하더라도 우리의 문맹률은 70퍼센트에 달했다. 나머지 30퍼센트의 독서인구, 그리고 더 좁혀서 일본어 해독력까지 갖춘 10퍼센트의 조선인이 사회의 지도층을 형성했다. 반대로 글자를 모르고 책을 읽지 못하는 무지한 대중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다. 동시에 그것은 예속의 근거이기도 했다.
해방 이후 보통교육이 시행되면서야 비로소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문해력을 갖춘 인구가 문맹 인구보다 더 많은 시대로 진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민주주의의 핵심 조건이기도 하다. 소위 민주공화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할 때, 그 국민은 형식적인 자격으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자격, 균등한 능력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아니 그러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전제된다.
하지만 1948년 최초로 총선거가 실시될 당시에는 이 기본 능력조차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투표방식으로 도입된 것이 후보자의 이름을 투표용지에 써넣는 기재투표 방식이 아니라 작대기로 기호를 표시하는 기호투표 방식이었다. 문맹자가 다수였던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이후에 이것은 후보자의 이름과 숫자가 나열된 공란에 붓 뚜껑으로 표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지만 역시나 원시적인 방식이란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요즘은 초등학교 반장선거에서도 후보자의 이름을 적어내는 기재투표를 하는 것과 비교해보아도 알 수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자 알렉시 드 토크빌은 “모든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독서능력을 그 수준의 척도로 삼는다면 우리는 세 종류의 정부, 혹은 세 단계의 정부를 가질 수 있다. 곧 ‘문맹자가 다수인 국가의 정부’, ‘문해력을 갖춘 국민의 정부’, ‘독서력을 갖춘 국민의 정부’가 그것이다. 독서능력의 여부가 국민의 수준을 결정하고 그 국민의 수준이 다시 정부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이라면 독서의 사회적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책을 읽는 능력은 각자가 ‘나’를 만들어나가는 최상의 방책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더 나은 정치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필요로 하는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다. 우리가 무얼 읽느냐에 따라서 한국의 미래가 달라진다. 독서는 우리 자신을 바꾸면서 동시에 이 사회를 바꾸어나가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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