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위를 나타내는 의존명사의 쓰임 - ‘장미꽃 열 송이’와 ‘장미꽃 삼십(三十) 송이’
한국어에는 무엇을 셀 때에만 쓰이는 의존명사 있다. ‘개 한 마리, 학생 네 명, 꽃 한 송이, 사과 한 개(個), 열한 시(時) 칠 분(分) 오 초(秒), 이십 세(歲), 이십 리(里), ···’에서 밑줄 친 ‘마리, 명, 송이, 개, 시, 분, 초, 세, 리’ 등이 그것이다. 이들을 단위성 의존명사라고 한다. 한국어에는 단위성 의존명사가 풍부하게 발달해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다른 언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한국어의 특징이기도 하다.
단위성 의존명사는 항상 수를 나타내는 말을 앞세운다. 수를 나타내는 말에는 ‘한, 두, 세, 네, 다섯, ···’과 같은 고유어계가 있는가 하면, ‘일(一), 이(二), 삼(三), 사(四), 오(五), ···’와 같은 한자어계가 있다. 그런데 수를 나타내는 말과 단위성 의존명사와 어울릴 때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된다.
(1)가. 소 한 마리/ *소 일 마리(*는 규범에 어긋난 표현을 가리킴)
나. 장미꽃 다섯 송이/ *장미꽃 오 송이
다. 열 살/*십 살
라. 이십 세(歲)/ *스무 세
마. 십 리(里)/ *열 리
(1가, 나, 다)의 단위성 의존명사 ‘마리, 송이, 살’은 그 앞에 고유어계 수사(또는 수관형사)만이 올 수 있는 반면, (1라, 마)의 ‘세(歲), 리(里)’는 한자어계 수사와만 어울린다. (1)을 관찰하면 수사와 단위성 의존명사가 어울릴 때 어떤 규칙성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곧 (1가, 나, 다)처럼 단위성 의존명사가 고유어인 ‘마리, 송이, 살’일 경우 고유어계 수사와 어울리고, (1라, 마)처럼 단위성 의존명사가 한자어인 ‘세(歲), 리(里)’일 경우 한자어계 수사와 어울린다.
그러나 늘 그런 것은 아니다.
(2)가. 열한 시(時)/ *십일 시
나. 삼겹살 세 근(斤)/ *삼겹살 삼 근
다. 사과 두 개(個))/ *사과 이 개
(2)의 ‘시(時), 근(斤), 개(個)’는 한자어 의존명사이지만 한자어계 수사가 아닌 고유어계 수사와 어울려 쓰인다. ‘시(時)’의 경우가 특이하다. ‘열한 시(時) 칠 분(分) 오 초(秒)’의 ‘시(時), 분(分), 초(秒)’ 모두 시간을 나타내는 한자어 의존명사임에도, ‘분(分), 초(秒)’가 한자어계 수사와 어울리는 데 반해, ‘시(時)’만 유독 고유어계 수사와 어울린다. 한편 서양 외래어 계통의 단위성 의존명사는 (3)에서 볼 수 있듯이 한자어계 수사와만 어울린다.
(3)가. 쌀 이(二) 킬로그램/ *쌀 두 킬로그램
나. 거리 오(五) 미터/ *거리 다섯 미터
다. 일(一) 달러 오십(五十) 센트/ *한 달러 쉰 센트
그런데 고유어계 수사와 어울려 쓰이는 의존명사라도, 수 단위가 커지면 한자어계 수사와 어울려 써도 어색하지 않게 된다. 아래를 보자.
(4)가. 소 서른 마리/ 소 삼십 마리
나. 장미꽃 스무 송이/ 장미꽃 이십 송이
다. 쉰 살/ 오십 살
라. 삼겹살 마흔 근/ 삼겹살 사십 근
마. 사과 스물다섯 개/ 사과 이십오 개
(4)의 단위성 의존명사 ‘마리, 송이, 살, 근, 개’는 수 단위가 낮으면 고유어계 수사와만 어울리는데, 수 단위가 높아지면 한자어계 수사와도 자연스럽게 어울려 쓰인다. 이처럼 수사와 단위성 의존명사의 결합 양상은 꽤나 복잡하게 나타난다. 언어가 꽤 엄격한 규칙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데, 수사와 단위성 의존명사가 연결될 때에는 엄격한 규칙성을 찾기가 어렵다. 관용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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