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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채만식 『탁류』

강유진 기자
- 10분 걸림 -
   
 

 군산시에서 ‘탁류길’을 조성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탁류길’에는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배경이 되었던 공간뿐만 아니라 영화 촬영지, 일본강점기의 가옥, 부윤 관사, 동국사와 같은 장소와 건축물을 연계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할 계획이다.     

「탁류」(조선일보에 1937년 10월 12일부터 1938년 5월 17일까지 198회에 걸쳐 연재)는 군산 출신 소설가인 채만식(1902-1950)의 대표작 중 하나로, 식민지 현실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력과 식민지 도시생활의 형태론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더불어 「탁류」에 부정적으로 나타나는 미두장, 유곽, 은행 등은 식민지 상황과 관련한 채만식의 현실 인식을 여과 없이 드러내준다.

다양한 인간군상이 등장하여 소설을 이끌어가는 「탁류」에는 30년대 말의 군산이 거의 완벽하게 복원, 또는 재현되고 있다. 작가가 살아가는 현실 공간은 소설 속에서 허구화되고 재구성된 공간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공간 설정은 작가 정신이 크게 작용할 뿐만 아니라 공간과 인물의 관계 규명은 그 공간이 소설 외적으로 기반하고 있는 사회상의 표출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탁류」는 초봉의 아버지 정주사가 미두장에서 하바(불법거래)를 하다 젊은이에게 봉변을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소설의 화자는 “집이야 낡은 목제의 이층으로 헙수룩하니 보잘것없어도 이곳이 군산의 심장임에는 갈데없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미두장은 군산의 심장이요, 전주통(全州通)이니 본정통(本町通)이니 해안통(海岸通)이니 하는 폭넓은 길들은 대동맥이다.”라고 말한다. 미두장(정식 명칭은 군산 미곡취인소) 1932년 1월에 개장하였다. 미두장은 조선인 토착자본의 잠식과 미곡의 수탈, 반출을 용이하게 할 목적으로 일제에 의해 법제화된 것으로, 근대와 수탈의 상징이자 식민지 자본주의의 물질적 욕망을 표상한다. 6‧25 때 소실된 미두장은 조선은행 맞은편에 있었으며 지금은 표석만 남아있다. 

소설에서 “푸른 지붕을 이고 섰는 ××은행”은 장미동에 위치한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건물이다. 고태수는 이 은행 당좌계에 근무하면서 소절수를 위조하여 고객의 예금을 횡령한다.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1923년에 지어졌으며 당시에는 경성에서나 볼 수 있는 최신식 건물이었다. 외벽은 서양식, 지붕은 일본식의 혼합형이며 당시엔 군산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현재는 근대 기초과학 및 기술 체험시설로 증‧개축 공사가 진행 중이다. 

째보선창은 정주사가 금강 건너 서천 용댕이(龍塘)에서 군산으로 건너와 첫발을 디딘 곳이자 밑천 없이 하바를 하다 젊은이에게 봉욕을 당한 뒤 자살 충동을 느끼던 곳이다. 째보선창의 원래 이름은 ‘죽성포구’이다. 복개공사로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째보선창은 조정래의 「아리랑」 3권에서 “언청이의 입술처럼 째졌다고 해서 째보선창이라고 한다는가 하면, 하필이면 언청이가 오래도록 유곽을 하고 있어서 째보선창이라 한다.”(211쪽)라고 서술되기도 한다. 

동령고개는 자신의 집과 미두장을 오가던 정주사가 넘어 다니던 곳이다. 소설에서 “이 네거리에서 정주사는 바른편으로 꺾이어 동녕고개 쪽으로 해서”라거나 “정주사는 내키지 않는 걸음을 천천히 걸어 전주통(全州通)이라고 부르는 동녕고개를 지나 경찰서 앞 네거리에 이르렀다.”라고 묘사된다. 동령고개라는 명칭은 원래 이곳에 있었던 ‘동령산’에서 유래한다. 이 고개 양쪽에는 은행들(식산은행, 상업은행, 동일은행 등)이 줄지어 있던 은행거리였다. 현재에도 제일은행과 전북은행 등이 자리하고 있다.

정주사 일가가 살던 둔배미는 현재의 둔율동(屯栗洞) 근처이다. 미두장에서 정주사 집으로 가려면 ‘콩나물 고개’를 올라야 한다. “그 집들이 콩나물 길 듯 주어 박힌 동네 모양새에서 생긴 이름인지, 이 개복동서 그 너머 둔뱀〔屯栗里로 넘어가는 고개를 콩나물고개라고 하는”에서 나타나듯 인구밀도가 높아 생겼다는 설과 콩나물을 많이 길러서 생겼다는 설이 있다. 현재는 구 국도극장에서 선양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기생 행화의 집은 개복동 초입에 있다. 열세 살의 명님이가 이백 원에 팔려간 개명옥(開明屋)도 “온통 색주가집 모를 부은 개복동 아랫비탈”에 있다. 약제사의 꾐에 빠져 멋모르고 따라갔던 남승재가 도망쳐 나와 “환장한 인간들로 더불어 동물로 역행”한다며 욕지기를 했던 곳도 개복동이다. 개복동 유곽은 일제강점기에 형성돼 현대에까지 이어져오다 2002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개복동 화재로 폐쇄되었다. 현재는 이 일대가 ‘예술의 거리’로 조성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탁류길’ 코스에서는 제외되었지만, 구 군산역 앞에 있는 전북약국은 초봉이 근무하던 약국 자리인데, “정거장에서 들어오자면 영정(榮町)으로 갈려 드는 세거리 바른편 귀퉁이에 있는 제중당(濟衆堂)이라는 양약국이다.”라고 묘사된다. 그리고 남승재가 근무하던 금호병원(錦湖病院)은 전북약국에서 구 군산역을 등지면 대각선으로 보이는 가전제품 판매점이다. 고태수가 죽고 가족 몰래 서울로 가던 초봉이 “정거장으로 나오는 길에는 승재가 있는 금호병원께로 자꾸만 주의가 끌리는 것을 어찌하지 못하여 가뜩이나 마음이 어두웠다.”라고 표현하는 대목에선 아직도 남승재를 잊지 못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고태수가 결혼한 초봉에게 사다준 “과자꾸러미”를 당시 군산부청 건너편에 있던 화과점 ‘이즈모야(出雲屋)’에서 구입했을 거라는 상상은 어렵지 않다. 현재 그 자리에는 간판을 바꿔단 ‘이성당’이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지금은 보행만 허용되는 해망터널이 “네 남녀가 탄 자동차는 길로 먼지를 하나 가득 풍기면서 공원 밑 터널을 빠져”라고 하는 것에서 당시엔 자동차 통행도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태수와 초봉의 신혼집이 있던 자리가 “소화통(昭和通)이 뻗어 나간 뒤꼍으로 예전 ‘큰샘거리’의 복판께 가서 바로 길 옆에 나앉은”이라는 문장으로 미루어보아, 현재의 개복교회 근처라고 짐작된다. 또 고태수가 한참봉에게 홍두깨로 맞아 실려 간 도립병원은 현재의 해양경찰서 자리이고, 고태수와 초봉이 결혼식을 올렸던 공회당은 현재의 금동 소방서 맞은편에 있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탁류」에 등장하는 공간들은 30년대 말 군산시가지 모습과 일치한다. 실제로 현재의 군산 구 시가지 또한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그대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의 나를 현재의 나와 구분하는 것도, 과거의 나를 현재의 나와 동일시하는 것도 기억의 작용 때문이다. 기억은 문화와 유산을 만들고 축적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공간을 추구하는 한편으로 자기가 속한 공간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며 정체성을 확립해간다. 공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 삶을 규정하고 규제한다. 공간의 연결 관계를 주목하면 그 공간들에 내재돼있는 의미와 가치를 파악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공간과 인간의 상호관계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탁류」에서 형상화된 30년대 말 군산을 현재에 되살리는 노력이 역사적으로,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탁류길’을 통해 30년대 말의 군산을 제대로 복원하고 관리한다면 군산에 산재한 문화관광자원과의 연계 거점으로 활용도가 높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근대문화유산은 단절과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보전과 활용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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