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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산월리 유적

정은해 선임기자
- 5분 걸림 -

군산시 대야면 버스터미널 뒷산은 동서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어 넓은 대야평야를 사이에 두고 만경강과 서해를 마주하고 있다. 터미널 뒤 가파른 작은 산책로를 따라 조금만 오르면 정상에 닿을 정도로 나지막한 산으로 아래에서 보는 것과 달리 정상부는 편평하고 넓다. 이 곳에 삼국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군산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군산 산월리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산월리 유적은 정상부를 따라 좁은 임도를 개설하면서 생긴 절단면에 산산히 부서진 원삼국시대 독무덤이 드러나있는 것을 산책 중이던 초등학교 선생님께서 우리 대학 박물관에 제보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유적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중요한 고고학적 연구자료를 얻기 위한 순수 학술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유적이름은 유적이 자리하는 말단 행정지역명을 붙이는 고고학 방법에 따라 산월리 유적이라 불리게 되었다.
발굴조사를 통해 산 정상부 두 곳에서 유적이 확인되었는데, 가지구에서는 원삼국시대 무덤이, 나지구에서는 원삼국시대 주거지 4기와 돌방무덤을 중심으로 백제 고분 10기가 조사되었다. 특히 나지구는 원삼국시대에는 사람들이 살아가던 마을이었다가 다음 시대인 백제 때 묘지가 들어서는 모습을 보인다.
원삼국시대 주거지는 네모난 형태의 움집이 오밀조밀 붙어 있었으나 이후 백제 돌방무덤이 축조되면서 대부분 파괴되어 바닥만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질의 다양한 토기와 돌로 만든 추, 실을 짓던 가락바퀴 등 유물이 매우 풍부하게 수습되어 상당히 많은 집자리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은 방처럼 넓은 돌무덤으로 드나들 수 있는 널길이 있으며 이 널길을 통해 두 번이상의 시신을 안치하는 형태로 추가장이 가능한 묘제다. 7기의 돌방무덤에서 300점 이 넘는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오랜동안 이 곳이 예비군 훈련장으로 사용되면서 무덤의 윗부분이 대부분 유실되어 바닥부분만 남아있었지만 놀랍게도 유물은 무덤안에 부장 당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평면이 정사각형에 가깝고 널길이 오른쪽, 왼쪽, 모서리로 무덤마다 각각 달리 놓인 돌방무덤의 모습이 그동안 정형화된 일반적인 백제 무덤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조사되었던 백제 무덤과 달리 매우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부장되어 있었는데 장군, 입넓은항아리, 삼족토기, 굽다리접시 등 한성백제의 몽촌토성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보인다. 특히 6점의 둥근고리자루칼을 비롯한 긴칼, 창, 낫, 도끼 등 무기로 사용되었던 철기가 다량 출토되었다. 이는 돌방무덤에 묻혔던 자들의 지위와 직업을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긴 칼자루 끝에 둥근 고리가 달린 둥근고리자루칼과 함께 말이빨, 말뼈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상당한 수준의 세력이 아니면 묻히기 힘든 위세품으로 해석되는 중요한 유물이다.
이와같은 유적이 자리한 곳에 올라서면 북쪽에는 산과 곡간으로 둘러싸여있고, 남쪽으로는 넓은 들과 강, 그리고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원삼국시대에는 시야가 확 트인 이 곳에서 바다와 갯벌을 통해 풍부한 식량을 구해 부족함 없이 살아갔을 것이다. 또한 백제 돌방무덤에 묻힌 피장자들은 만경강과 서해, 그리고 금강에 둘러싸여 군사적, 지리적으로 매우 위치에 있던 군산을 목숨을 걸고 지키던 자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 대학 박물관 전시실에는 산월리 유적에서 발굴조사된 유물들이 40% 가량을 차지하고 있음은 군산의 선사시대에서 이 유적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한 가운데 전시되어있는 커다란 독무덤이 산월리 유적을 알려준 바로 그 유물이다. 막연히 둘러보았던 박물관에서 다시한번 찬찬히 유물을 바라다 보자. 이 땅을 지키고자 치열한 삶을 살았던 군산사람들을 유물을 통해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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