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그인

군산대인이여! 단결하자

군산대언론사 2
- 5분 걸림 -

흔히 역사를 거울에 비유한다. 그래서 역사서를 거울 감(鑑)자를 써서 ‘통감(通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국의 자치통감이나 우리나라의 동국통감 등이 그 예이다. 역사를 거울이라고 처음 말한 사람은 당태종 이세민이다. 그는 “거울로 내 모습을 비추어보아 옷매무새를 바르게 고칠 수 있는 것처럼, 역사를 거울로 삼아 흥망과 득실을 알 수 있다.”라고 하면서 “역사는 오늘날의 모습을 바르게 고칠 수 있는 거울이다.”라고 말하였다.
오늘날 우리 대학의 외부 환경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수도권과 지방대학의 양극화가 극심해지면서, 지역의 인재들이 계속 수도권으로 유출되고 있고, 또 학령인구의 감소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대학의 위기라는 거대한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우리 대학 내부에서는 총장 선거 등을 둘러싸고 끊임없는 갈등이 계속되고 있고, 이것이 또 지역신문에 상세히 보도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오늘의 우리 모습에 비추어볼 만한 사건이 백제 말기에도 있었다.
군산 지역에 전해오는 오성산 전설에 따르면, 백제말기인 660년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침략군 13만 명이 사비성(부여)을 침공하고자 군산에 상륙하였다 한다. 이때 소정방은 안개가 자욱하여 길을 찾을 수 없자, 군산 지역의 다섯 노인에게 길을 안내하라고 요구하였다. 노인들이 “네가 우리나라를 치고자 하는데 어찌 길을 가르쳐주겠느냐?”며 거부하자, 소정방은 화를 내어 다섯 노인을 죽였다고 한다. 지금도 오성산 정상에는 오성인(五聖人)의 무덤이 있다. 이에 반해 군산에는 천방사 전설이라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군산에 상륙한 소정방이 안개가 짙게 끼어 길을 찾을 수 없자, 부처님에게 “안개를 걷어 주시다면 절 천 채를 지어 부처님을 받들겠습니다.”라고 기도하였다 한다. 그러자 그날로 하늘이 맑아졌는데, 소정방이 산에 올라가 보니 산세가 작아 도저히 천 채의 절을 지을 수 없자, 돌 천개를 늘어놓고 한 채의 절을 짓고는 이름을 천방사라 지었다고 한다.
이 두 전설은 백제 말기 군산에서 당군의 침략에 대하여 서로 상반된 태도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오성산 전설에서 군산 주민으로 상징되는 오성인들은 당나라의 침략에 결단코 저항한 반면, 천방사 전설에서 불교계는 당나라의 침략에 협력했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실제 당시 백제 불교계는 불교국가인 당나라에 대하여 호의적이었다. 부안의 내소사는 소정방이 왔다간 절이라고 해서, 올 래(來)자와 소정방의 소(蘇)자를 써서 내소사라고 지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백제 말기 불교계는 국가와 민족보다는 자신들의 종교를 더 소중히 여기고, 불교국가인 당의 침략에도 협조적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구성원 내부의 분열로 인해 백제는 멸망하고 백제 국민들은 당군에게 처참한 피해를 겪었다. 당군들은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하였으며 젊은이들을 잡아 죽이는 등 온갖 행패를 자행하였던 것이다. 이에 비해 신라의 불교는 호국불교를 지향하였다. 신라의 불교계는 자신의 종교보다 공동체의 수호를 더욱 소중히 여겼다. 이러한 호국불교 하에서 신라인들은 일치단결하여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백제 말기 당나라 13만 대군이 침공해왔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대학의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 그런데 우리 대학의 학생과 교직원 중에서는 자신의 영역을 대학 전체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있는 듯하다. 또다시 백제 말기처럼 구성원들이 각자 자신의 영역만을 고집하고 분열하여 공동체 전체를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지 않은가? 군산대인이여! 단결하자. 그리하여 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자.

작가와 대화를 시작하세요
대학오피니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