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대학교 학생의 80%가 타지역 출신이니. 학생 대다수에게 군산은 낯선 도시이다. 이 ‘낯섬’은 때때로 ‘불편함’으로 이어진다. 부모 형제를 떠나 외지에서 살아야 하는 것도 불편한데, 여기에 더해 볼품없는 작은 도시에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마음의 초라함을 야기한다. 주변의 지인들이 그래도 군산에 사는 사람이라고 ‘군산 어때’라고 물으면 그 불편함은 당혹감으로 커진다. 학교와 숙소를 오가는 생활을 반복했을 뿐 군산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사람도 배울 기회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불편함, 당혹감은 군산대학교 학생들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군산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지금도 삶의 터전을 군산에 갖고 있는 시민들도 비슷한 느낌을 갖고 있었다. 한국이 수도권 위주로 운영되면서 돈과 권력이 중앙에 집중되고 지역에 대한 차별이 만연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이 지역의 정체성 형성을 위한 기본적인 지식 체계의 수립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동안 군산의 역사와 문화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교육하는 기관이 매우 부족하다보니, 군산 시민들조차도 군산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다. 군산에 대한 정보의 부족은 ‘군산 사람’이라는 정체성 형성을 막아왔고, 이런 정체성의 부족이 마음의 공허함을 키운 것이다.
군산시와 군산대학교 사학과는 이런 문제 의식을 갖고 ‘군산학 : 군산을 제대로 이해하기’라는 주제로 연속 강의를 진행하였다. 강의 개설이 알려지자 시민들이 뜨거운 호응을 보내주었다. 수용 가능인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수강을 신청하였고, 수강을 신청하지 않은 시민들의 ‘청강’도 많았다. 또 수강에 참여한 시민들은 12주나 되는 강의에도 불구하고 80% 이상의 출석률을 보여주었다. 시민들의 이런 열정은 군산학의 필요성이 절실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절실함이 지역학 연구로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군산학 책임자로 강의를 진행하면서 깨달았던 가장 큰 문제의식을 나누고자 한다. 군산에 대해 논하면서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군산 역사의 재정립이다. 일반적으로 군산은 근대의 도시, 일본인이 만든 도시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일본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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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만들어 놓은 허상을 깨고 군산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그 위용은 눈부시다. 군산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문물 교류의 창구 역할을 하였고, 국제 교류의 중심지였다. 이는 군산이 천혜의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대한민국 전체에서 군산만큼 좋은 지리 조건을 갖춘 곳은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만 전근대 세계에서 바다와 강은 고속도로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군산은 바다와 접해있으며 금강과 만경강을 끼고 있다. 군산은 두 강을 통해서 호남 평야 전체, 그리고 부여, 공주를 비롯한 충청 남부를 외부 세계와 연결하였고, 또 바다를 통해서 외국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였다.
군산이 삼국시대부터 국제 관계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백제의 역사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백제가 금강 변에 위치한 공주와 부여로 수도를 옮긴 후 군산은 백제의 관문이었다. 백제의 영역 하에 있는 지역으로부터 온갖 물산이 군산을 통해서 수도로 공급되었고, 중국을 비롯한 외부 국가들은 군산을 통해서 백제와 교류하였다. 이렇게 군산이 지리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에 7세기 백제 멸망기에 동아시아 삼국, 즉 당나라, 신라, 일본의 수십만 대군이 군산에 모여서 싸웠다. 이것이 이른바 백촌강 전투이다.
고려 시대에도 군산은 호남과 충청을 개성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고려 정부는 진성창을 설치하여 군산을 호남과 충청 지역 세곡 수송의 중심지로 삼았다. 군산은 또한 국제 교류의 장이었다. 고려의 주요 교역국들이 고려를 방문할 때면 군산도(지금의 선유도 일대)를 경우하곤 하였다. 고려는 접견사를 선유도까지 보내어 사신들을 환영하였다. 가령 삼국사기의 저자로 유명한 김부식이 송나라의 사신 서긍을 선유도에서 접견하였다.
조선도 금강 하구에 두 개의 조창, 즉 득성창과 군산창을 설치하여 호남과 충청 지역의 세곡을 한양으로 옮겼다. 군산의 세곡이 매우 중요했기에 군산에서 세곡이 올라가지 않으면 관리들 봉급을 줄 수 없을 정도였다. 조선 중기 이후 상업이 발달하면서 군산은 매우 번화한 상업 도시로 성장하였다. 또한 조선 정부는 서해안의 방어를 위해서 선유도에 최대의 수군 기지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백제에서 조선에 이르는 전근대 시대에 군산은 대한민국 최고, 최대의 물류 중심지였고, 상업이 발달한 곳이었으며, 해상 방어의 중심지였다.
일제에 의해 이루어진 근대 군산의 성장은 전근대 시대에 가졌던 군산의 위상을 발전시킨 것이다. 일제는 조선을 침략하면서 군산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조선 정부에 군산을 개항해줄 것을 거듭 요구하였다. 처음에 조선정부는 개항이 가져올 부작용을 염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한제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외부 세계와 적극적인 관계를 맺을 필요성을 깨닫고, 마산, 성진과 함께 군산을 주체적으로 개항하였다. 그렇지만 개항이 이루어진 후에 일제가 적극적으로 군산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군산 지역의 주도권은 일제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일제는 군산 지역에 많은 일본인을 이주시키고, 군산을 호남과 충청 지역 침탈의 중심지로 삼기 위해서 은행과 철도와 같은 기반 시설을 마련하였다.
이렇게 보면 근대기 군산의 역사의 가장 큰 특징은 수동성, 피동성인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면만을 보는 것이다. 군산 시민들은 일제의 침탈에 맞서는 한편 근대 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한국을 발전시키는 일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먼저 개항 직후 군산 시민들은 시대의 변화에 적극 대처하기 위해서 근대식 교육을 수행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군산 시민들은 당시 최고의 근대신 중등 교육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금호학교를 1907년에 만들었다. 금호학교는 선진 학문 교육의 중심지로 알려져 여러 지역에서 주요 인사들이 와서 교육을 받았다. 그 가운데는 후에 민족운동 계열의 지도가가 될 김성수와 송진우, 공산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김철수와 같은 주요 인물도 있었다. 이렇게 군산 시민들이 근대적인 중등 교육 기관을 만들었다는 것은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군산 시민들의 능동성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군산이 도시로 성장하면서 인근 지역의 몰락농민, 지식인, 자산가 등이 새로운 삶을 찾아 군산으로 모여들었다. 군산에는 개항초기부터 부두에서 하역작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노동회사와 조합의 성격을 혼합시킨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있었다. 1920년대 들어서는 더욱 발달하여 철도, 운수노조, 정미, 미선공 조합을 비롯한 30여개에 달하는 다양한 노동조합이 형성되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대에 군산은 민족운동, 노동운동의 ‘중추지대’로 불리게 될 정도로 큰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1920년대 이후 군산은 일제의 침탈로 죽어가는 곳이 아니라 조선 사람들의 땀과 기개가 넘치는 곳이었고, 무엇보다 휴머니즘이 꽃피는 곳이었다. 군산의 노동자들은 기아와 기근에 시달리는 다른 지역의 동포를 돕기 위해 ‘하루 한끼 굶기 운동’을 펼쳤다. 노동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의 동포애가 그렇게 컸다.
이렇게 군산에 대해서 몇 가지 사실만을 새로이 안다면 군산대학교 학생이나 군산 시민이 느꼈던 불편함, 당혹함은 많이 해소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군산은 볼품없는 작은 도시, 일제 침략의 아픔만을 간직 한곳이 아니다. 삼국 시대부터 호남과 충청 남부의 최대 항구이었으며, 한국과 외국을 연결하는 거점지역이었다. 외국의 선진 문물이 가장 먼저 오는 곳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서 번성한 곳이었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에 맞서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서 교육 운동을 펼친 곳이었으며,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한 사회 운동의 ‘중추 지대’이었다. 그 무엇보다도 굶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도왔던 휴머니즘이 넘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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