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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문학상 학술부문 가작(독서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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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독서리뷰) 무정으로 바라 본 청춘

 현대 청춘들의 두 다리는 가는 길이 정해져 있는 듯하다. 한쪽 다리로는 공무원이 되기 위한 길을 걸으며, 다른 한쪽 다리는 대기업 입사를 위한 길을 걷는다. 이외의 길은 어느 누구나가 걱정의 빛을 띠고 공무원이나 좋은 곳 취직을 하라며 다른 길을 걸으려 하는 이들을 막아 세운다. 수능을 치룬 학생들에게도 인문학부나 예체능계열은 굶어 죽기 좋고 취직하기 어렵다며 뜯어말리기 마련이다. 이에 따른 전국 대학교들의 비인기학과나 취직이 힘든 학과 같은 경우는 통폐합 되고 있다. 현대의 청춘들은 이러한 현실에서 두 가지의 좁은 길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이 많다. 남들이 가는 데로 휩쓸려 갈 것인가.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내가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할 것인가.
 이광수의 ‘무정’은 이 시대의 청춘이 갖는 고민에 대해 어느 정도 도움을 준다고 본다. 소설 속의 박영채는 우리들의 모습과 닮아 있다. 박영채는 불의의 사고를 당한 아버지를 위해 기생이 됐지만 그 사실에 아버지는 곡기를 끊고 별세한다. 이후 박영채는 아버지 박진사가 어린 시절에 이형식과 짝이 되라는 말 한마디에 정절을 지키며 이형식과 만날 날을 고대한다. 훗날 교사가 된 이형식을 만나게 된다. 만난 지 얼마 안돼서 박영채는 겁탈을 당하고 이형식을 위해 지켜온 정절이 더렵혀졌다 생각하여 자살을 결심하고 평양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이 때 뜻밖의 인물 병욱을 만나게 된다. 영채는 병욱에게 그간 속사정을 다 말하고 자살을 하러 가는 것이라 하였다.
 이에 병욱은 영채에게 하나하나 일깨워준다. 병욱이란 인물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들은 강렬하다. 첫째 영채는 속아 살아온 것이다. 어릴 적 아버지의 농 한마디 일수도 있는 것 하나 때문에 사랑하는지 어쩌는지도 모르는 남자를 위해 정절을 지킨 것이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진정 행복이 무엇인지 성공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청춘들에게 사회와 기성세대는 이 길이 행복과 성공의 길이라며 걸으라 한다. 청춘들은 아무 것도 모른 체 그 길을 걸어가고 그것으로 인한 고통과 좌절을 참는다. 그 고통과 좌절을 참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들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 같은 것인지 괴리감을 느낀다. 그 괴리감을 메우지 못한 사람들은 어렵게 취한 것을 내려놓기도 한다. 영채도 한 평생 정절을 지키며 꿈에 그리던 형식을 만났으나 사랑하는 감정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동안 헛된 꿈에서 산 것이었다. 합격만 하면, 입사만 하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라 생각하였지만 직접 대면한 그 현실은 또 다른 것이다.
 그러나 또 도중에 그만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기도 그렇고 주위 사람들이 만류할 것이다. 영채 또한 의리를 저버리고 행복을 찾는 것이 옳은 것인지 병욱에게 묻는다. 병욱은 죽는 것이 의리 같으냐고 되묻는다. 영채는 어떤 사람에게 마음을 허하였는데 그 사람에게 바치기 전에 정절을 지키지 못하였으니 죽는 것이 의리 아니냐고 한다. 이에 병욱은 영채 본인의 생각으로 허한 것인지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허한 것인지 묻는다. 영채는 그렇다고 그것이 삼종지도라며 당당히 말하지만 병욱은 탐탁치 않아한다. 겨우 그 몇 글자가 자신의 일생을 결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한다.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것은 마땅한 도리이지만 다른 사람의 말 보다 제 일생이 중요하다고 외친다.
 우리나라는 자식에 대한 부모님의 사랑이 남다르다. 그 사랑이 자식에게는 맹목적으로 부모님의 말씀에 따라 살게 한다. 어린 시절부터 대학에 가기까지 부모님이 짜놓은 플랜에 맞춰 가야 효도하는 자식이 된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부모님의 뜻대로 맞추어 가다보니 주체적으로 사는 자녀들이 적다. 대학교에 가서도 부모님 없이는 무엇 하나할 줄 모르는 바보가 되기도 한다. 오죽하면 헬리콥터맘 이라는 말도 생겨났겠는가. 자녀의 시간표를 짜주고 잘 안 나온 학점에 대해서는 교수님에게 따지기도 한다. 심지어 입사 불합격이나 승진에 대해서도 왈가왈부하는 부모님들도 있다. 이런 부모님들의 무차별적인 애정이 자녀의 일생을 자신들의 틀 안에 꾸역꾸역 넣으려 한다. 그 자녀들은 그런 부모님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살아간다.
 사회와 주변 사람들 또한 우리들을 틀 안에 가둔다. 대학교를 가는 나이와 군 입대를 하는 나이, 복학을 하고 나서 토익은 몇 점이 되어야 하고 공모전에 나가서 입상을 하고  각종 컴퓨터 자격증을 따야한다. 남자의 최고 직종은 공무원이 되거나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이고 여자 또한 공무원이다. 그중에서도 교육 공무원을 여전히 최고로 친다. 취직을 한 이후에는 적정 나이에 결혼을 해야 하며 집 또한 마련을 해야 하고 신혼여행도 해외로 나가야 한다. 자녀는 아들 딸 둘이 적당하고 어떤 영어 어린이집을 보내야 하는 이런 사회분위기가 요구하고 있는 것이 정형화 되어있다. 모두가 그 틀에 찍혀 완벽한 붕어빵이 되길 바란다. 적당한 반죽 양과 적당한 팥 양을 요구한다. 그것에 조금이라도 늦춰지거나 다른 선택을 하게 되면 모두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보고 인생에 실패 하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스스로 완벽한 붕어빵이 되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 한다. 자신이 가고 있는 길 끝에 무엇이 있고 그 다음은 어디로 가야 할지는 고민하지 않는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경주마처럼 그저 달릴 뿐이다. 나의 꿈은 생각조차 하면 안 된다. 꿈을 생각하고 좇는 순간 붕어빵 틀에서 벗어나게 된다. 나 자신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그 틀에 맞춰서 완벽한 붕어빵이 되어야 부모님에겐 자랑이 되고 주위 사람들에게 으스댈 수 있다. 나의 주관이 아닌 타인의 시선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 사회라는 눈이 우리를 끝없이 감시 하고 있다. 우린 자신이 자신의 주인으로서 살아가지 못한다. 우리의 주권을 타인, 사회에게 넘겨준다. 나다운 나가 아닌 공무원 합격생이거나 대기업 직원으로 평가받길 바란다. 그 끝은 절대 행복하지 않다. 10대부터 30대까지의 사망률 1위는 여전히 자살이다. 행복을 위해 산다고 하지만 과연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근 몇 년간 유행하는 예능 프로그램에는 명사를 초청하여 성공담을 들려주는 것이 많았다. 이런 예능 프로그램에 대해 도덕경은 이렇게 말한다. ‘훌륭한 사람을 숭상하지 말라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할지니,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하지 말라 백성들로 하여금 도둑이 되지 않게 할지니. 욕심 낼 것을 보이지 말라 백성들의 마음으로 하여금 어지럽지 않게 할지니.’ 명사가 나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과하면 서로 그렇게 되려고 서로를 밝고 일어서려 한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며 물질만능주의를 낳게 하고 지나친 사치를 보여주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를 둘러싼 이러한 사상들이 우리를 옭아매고 있다.
 병욱은 이런 낡은 사상에 얽매이지 말고 벗어 던지라고 한다. 그리고 자유를 얻으라고 한다. 속박에서 벗어나라고 외친다. 영채는 그러면 자기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여태까지 여러 직분에 얽매여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여자로 살아왔다면 이제는 자기 자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해준다. 이제는 누군가를 위한 ‘나’가 아니다. 제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병욱은 말해준다. 제 뜻대로 사는 것이 진정한 자유인 것이다. 자기로부터 말미암아 행하는 것 이것이 자유(自由)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실존해야 하는 것이다.
 19세기 이전 서양은 본질주의가 장기집권을 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를 형상과 질료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형상은 설계도의 역할을 하는데 그 실체가 어떤 것으로 만들어지는 것인지 규정한다. 예전부터 존재하던 설계도에 의해 구상되어지고 질료로써 이루어진다고 본다. 곧 과거에 이미 그 물질의 역할과 존재가치는 결정된 것이다. 19세기에 실존주의가 등장하면서 보통의 한 사물은 본질주의이며 과거에 그 역할이 결정되었다고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고 했다. 인간은 실존하여 미래를 산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본질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태어나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본인이 정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현재를 살아가고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곧 본질에 얽매이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가 자신의 미래를 결정지을 수 있는 힘이 있다. 이것이 실존주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실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이데거는 이 질문에 대해 죽음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가장 필요한 것이 어떤 것 인지 정할 수 있게 한다고 했다. 당장 내일 죽는다면 어떤 것을 할 때에 행복하고 유익한지 결정할 수 있게 해준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당장 내일 죽을 것처럼 일한다. 그리고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그것을 즐긴다. 본인이 하기 싫은 일, 남들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일하는 사람들은 내일 당장 죽는다면 이 일만은 하지 않을 것이라 답할 것이다.
 영채는 결국 병욱을 따라 갔다. 영채는 병욱의 집에 머물면서 그녀에게 서양식 감정을 맛본다. 그 중 서양의 예술에 흥미를 보이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아간다. 영채는 비로소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고 진정으로 행복을 실감한다. 병욱은 일본으로 가서 전문적으로 음악을 배우면 훗날 세계적으로 공명을 얻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둘은 일본으로 가서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우려 한다. 그러던 중에 형식과 형식의 약혼녀인 선형을 만나게 되지만 이미 다시 태어난 영채는 흔들리지 않는다. 넷은 자신들의 포부와 꿈을 밝히고 각자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열정을 쏟는다. 영채는 완벽히 다시 태어난 것이다.
 우리도 박영채 같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 타인이 만든 갑갑한 틀에서 빠져나와 실존해야 한다. 우리의 미래의 가능성을 우리 자신에게 맡기는 것이다. 당장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가슴 뛰는 일을 찾아야 한다. 누군가는 예술을 하고 싶을 것이고 누군가는 작가가 되고 싶어 할 것이다. 저마다 무엇을 할 때에 행복할지 찾아야 한다. 이제는 더 이상 위인지학이 아닌 위기지학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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