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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9월에 폭발한 미국발 금융공황과 산업공황으로 인해 세계경제는 큰 충격을 받았고, 주류경제학이1980년대부터 내세워 왔던 신자유주의도 크게 신뢰를 상실해서 이제 경제학계에서는 4.0자본주의라는 용어까지 쓰며 자본주의의 새로운 변신을 모색하고 있는 듯하다. 
   자본주의는 18세기 영국에서 발흥한 이래 많은 문제를 안으면서도 나름대로 내부적 동력에 의해 혁신을 거듭하면서 지금까지 발전해 왔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은, 소련의 붕괴와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보면, 자본주의의 승리로 판결이 났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자본주의에 비해 더 나은 사회를 제시한 공산주의가 패배한 이유는 무엇일까? 공산주의가 말하자면 가난한 나라에서 발생해서 결국 가난하게 패망했다는 것은 인류역사를 생각할 때 시사하는 바가 많다. 공산주의는 인간이 갖는 호모사피엔스적 이성과 동포애적 이상에 과도하게 기대한 나머지 인간사의 우연성과 복잡성을 간과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자본주의의 승리가 완전한 승리도 아니며 자본주의가 우리가 의존할 유일한 삶의 대안이라고 삼기에는 너무나도 불안한 체제라는 데 있다.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심각한 문제로는 자본가들의 무한정한 이윤추구에 의한 빈부격차의 문제와 무한정한 경제개발에 따른 자연환경의 파괴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듯이 자본주의 초창기에는 원래 공황이라는 것은 예측하지 못했고 아담 스미스의 말처럼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이라는 시장경제에 따라서 모든 것은 잘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뉴욕증권거래소의 주식이 폭락하면서 시작된 1929년의 대공황은 자본주의 경제에 큰 문제가 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공황은 과잉생산이 초래한 비극이었다. 물건은 넘쳐나지만 이를 구매할 소비자가 없어서 버릴 수밖에 없고, 근로자는 해고되고 공장은 문을 닫는 아주 이상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원래 자본주의는 17세기 영국의 농업혁명을 기반으로 해서 비로소 가능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농업혁명으로 인해 그 전의 농업사회에서처럼 절대다수의 인구가 농업에 종사할 필요가 없어짐으로 해서 비로소 공장이 생겨날 수 있었고 자본주의가 가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17세기 영국에서 인류는 비로소 굶주림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되어 자본주의가 가능하게 된 것이었는데, 자본주의체제는 오히려 과잉생산의 결과 빈곤을 재생산하는 기막힌 결과를 보여주었다. 세계경제의 중심지였던 미국에서 발생한 대공황은 결국은 2차세계대전으로 귀결되어, 수천만의 사상자와 헤아릴 수 없는 재산의 파괴와 인간문명의 불신 등 인류역사상 미증유의 비극을 초래하였다. 그 후 세계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진영으로 양분되었지만, 자본주의진영에서도 자유방임주의식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반성하고, 국가에 의한 통제가 가미된 수정자본주의노선을 채택하게 되었는데, 1974년 또 스태그플레이션 형태의 공황은 케인즈 식의 수정자본주의 노선을 거부하게 만들었고 다시 자유방임주의적인 신자유주의노선을 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유주의 정책은 다시 자본주의의 문제를 확대 재생산한 것처럼 보인다.
   2008년의 금융공황은 여러 번의 공황 중에서도 특히 자본주의의 장래와 관련하여 우려스러운 점이 있다. 그것은 슘페터가 말한 바 있는 자본주의가 자신을 보호해 줄 기관을 파괴하려는 성격으로 인해서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우울한 예견을 떠올리게 하는 점이 있기 때문에 섬뜩하기조차 하다. 미국의 역사학자 조이스 애플비는 2008년의 금융위기가 1929년의 대공황의 유산으로 만들어졌던 규제들을 신자유주의 정권의 의원들이 철폐한 데서 그 기원을 찾고 있다. 그리하여 비정상적인 액수의 자금이 세계시장을 떠돌아다니면서 금융자본이 실물경제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하게 되었고 이들의 거품이 빠져 주가가 폭락하게 되었을 때, 미국의 중앙은행에서 금리를 대폭인하해서 자금을 공급한 결과가 금융기관의 모기지(주택담보대출)를 증가시켰고, 모기지 회사는 불량차입자(서브프라임)들의 모기지까지 담보대출을 하여, 주택저당담보증권이라는 금융파생상품을 만들고, 여기에 피치, 무디스 같은 신용평가기관을 동원하여 최상급의 평가를 받아내고, 또 당시 세계최대의 보험회사인 AIG로부터는 보험증서까지 발행받아 가장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유가증권으로 선전하여 세계각국의 투자자들과 금융기관에 높은 가격으로 팔았던 것이다. 그런데 부동산가격의 하락으로 서브프라임모기지 등의 대출금 상환이 연체되면서 모기지 관련 금융기관들의 주가폭락과 파산, 주택저당담보증권을 보유한 투자자들의 파산 등이 줄줄이 발생한 것이다. 미국중앙은행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값싼 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이자율을 0%까지 낮추었지만 랭킹 5위 안에 드는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와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경기부양을 위해 오바마 대통령의 새 행정부가 대공황 이후 최대 규모의 공공 프로그램 지출을 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자본주의의 고질적인 문제로서 공황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이번 금융공황에서 우려되는 것은, ‘카지노 자본주의’라는 말까지 나오듯이 이번의 금융위기가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도박판 자본주의, 이성을 잃은 자본주의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애플비에 의하면 21세기 초반에 적어도 40퍼센트의 아이비리그 졸업생들이 금융업에 뛰어들어, 연봉 100만달러가 수두룩했고, 월스트리트에는 승자클럽이 결성되었는데, 이 클럽은 늘 구성원들을 더 큰 위험을 추구하도록 몰아갔고, 인센티브는 정직성마저 꺾어버렸다고 한다. 국가의 엘리트들이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 뛰어가는 풍경은 결코 정상적인 일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금융공황을 불러일으킨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은커녕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공적자금의 구제금융으로 사태가 지나가는 듯하다. 이러한 처리는 신자유주의 노선의 도덕적 파멸이라 할 만하다. 지난 월스트리트에서 일어난 데모는 여기에 대한 힘없는 민중의 항의일 것이다.     
   미국경제의 침체와 대조적으로 중국경제의 눈부신 성장을 두고, 미국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쇠퇴한 때문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그렇다고 중국경제의 발달이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 내지는 그에 비견할만한 내세의 구원을 갈망하는 금욕적인 윤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막스 베버의 명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정신>에 따르면, 자기직업에 충실해서 결과적으로 부자가 되는 것이 하느님에 의한 구제의 표시를 증명하는 것이라는 종교개혁의 금욕적인 윤리가 자본주의의 정신적 동력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희한한, 부와 구원의 결합이라는 빅뱅에서 자본주의는 가능한 것이라고 분석한 것이다. 이에 비해 동양의 경우, 예컨대 유교적 금욕주의에서는 이러한 구원의 논리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베버의 논리가 될 것이다. 근래 홍콩, 대만, 싱가포르, 한국 등 네 마리 작은 호랑이 등 신흥산업국가의 성공을 놓고는 유교르네상스 운운하면서 유교야말로 경제발전의 원동력이었다고 하여 막스베버의 자본주의론을 응용하려는 움직임도 있지만, 아시아신흥산업국의 경제발전은 유교와는 역시 무관한 것이라고 보인다. 오히려 유교적 금욕주의의 해제에 의해서 경제발전은 가능했다고 필자는 보고 싶다. 이제 우리의 뒤를 따르고 있는 중국의 경제발전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하버드대학의 니얼 퍼거슨 교수의 진단대로 중국경제는 공산당 지도하에 자본주의노선을 걷고 있는 국가자본주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중국에서 최근에는 천안문 광장에 공자의 대형동상을 세워 상징적으로 유교의 부흥이라도 주장하고 있는 듯하고, 공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등도 상영되고 있다. 이미 중국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공자타도 운동을 내걸어 공자의 묘까지 파괴할 정도로 격렬한 공자비판운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이제 공자를 내걸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필자가 보기에는 자본주의적 발달에 따른 사회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사회통합(和諧)의 수단으로서 공자를 내걸고 있는 것으로 중화제국적 내셔널리즘의 표현으로 보이는데, 내셔널리즘의 상징으로 공자를 선택했다면 이는 공자를 오해한 것이다. 공자는 도를 찾아 천하를 방랑한 사람이었다. 도가 행해지는 곳이라면 뗏목을 엮어서 외국변방이라도 가고자 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프로테스탄티즘에 대비되는 일종의 유교적 금욕주의를 내세우려고 한 것일까? 그러나 이것도 공자를 오해한 것이다.  “부귀는 누구나 바라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道)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누리지 말고, 빈천은 누구나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하게 그렇게 된 것이라면 피하지 말아야 하리라(논어/이인)”, “정의로운 나라에 살면서 빈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정의롭지 않은 나라에 살면서 부귀한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논어/태백)”라는 공자의 말을 보면, 공자는 어디까지나 정의로운 나라에서는 부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막스베버는 사람들이 왜 저토록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일까를 탐구한 끝에 그것이 종교개혁 시기의 인간구원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음을 밝혔다. 자본주의가 확립된 다음에는 종교적 구원의 문제는 잊혀져 버리고, 돈 자체를 버는 것이 목적이 되었다고 한다. 공자가 보기에는 도가 사라진 세상일 것이다. 현재의 자본주의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지만 앞으로도 자본주의에 근본적인 개혁이 없다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신뢰는 없이 돈에 예속되고 대출에 묶여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일상이 계속되다가 다시 공황이 반복될 것이다. 문제는 그 사이에 발생하는 수많은 힘없는 사람들의 희생이다.
   “파산없는 자본주의는 지옥없는 기독교와 같다”는 말이 들린다. 금융위기를 바라보는 경제학자들이 이제 모럴 해저드(moral hazard)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죄를 다스리는 것은 종교에서만이 아니라 경제학에서도 필요할 것이다. 무슨 큰 문제가 터지면 정부가 은행에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것도 모럴 해저드에 속할 것이다. 이것은 정부관계자가 금융당국자와 한 배를 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만인의 정부이지 몇몇 은행장과 브이아이피 고객들을 위한 정부가 아닐 터이다. 공자의 말을 되살려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부귀인지 아닌지 판단해서 판결해주는 정의로운 정치가와 재판관들이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 그러한 정의로운 인물들을 키워내기 위해 교육은 백년지계라는 말 대로 모든 학교에서 정의로운 교육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오늘날 공자의 부활은 중화제국의 표상으로서가 아니라 정의로운 교육의 위대한 선구자로서만 글로벌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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