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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햇볕이 따사롭고 바람이 좋은 날에 고즈넉한 향교에 들러보는 여유도 좋을 듯하다. 향교에서 배어나 오는 평화롭고 넉넉한 전통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향교는 고려 이후 유학 교육을 위해 각 지방에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우리 학교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는 옥구향교는 옥구읍성 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관아시설이다. 옥구향교를 찾아가기 앞서 옥구읍성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본다면 더욱 좋을 듯하다.
우리 군산대학교 남쪽에 자리한 옥구읍은 기름진 들판과 들판 사이로 도랑이 장관을 이룬다는 말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백제 때 옥구지역은 마서량이라고 불리다가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 옥구현으로 바뀌게 되었다. 옥구향교가 자리하고 있는 옥구읍 상평리는 남쪽에 상평이곡평야가 넓게 자리하고 있고 그 앞에 서해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옥구향교는 북쪽은 산줄기에 의해 둘러싸여 있고, 남쪽은 평지를 이루는 완만한 경사면에 계단식으로 자리하고 있다. 원래 옥구읍성 안에는 객사, 동헌, 관아 등 30여 개의 관아 시설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여러 가지 사연들을 가지고 일제강점기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옥구향교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옥구읍성은 일부분이 훼손 내지 유실되었지만 향교와 함께 남아있는 매우 중요한 문화재다. 옥구읍성은 서해와 금강의 입구에 자리한 옥구지역의 지리적, 군사적 중요성에 의해 옥구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세종 4년(1422)에 읍성으로 축조되었다. 옥구읍성은 광월산의 남쪽 봉우리를 정점으로 동쪽과 서쪽에 날개처럼 흘러내린 구릉의 정상부에 축조되어 있는 평산성으로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축조되었다. 이후 400여 년간 옥구읍성으로 사용되어 오다 19세기 후반에 읍성의 역할을 잃어버리면서 관심 밖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옥구읍성의 성곽은 여러 사료에 의하면, 돌로 쌓은 석축성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지금은 무성하게 수풀이 우거져 있어 눈으로 확인하기에는 어렵다. 남문으로 추정되는 곳이 일제강점기에 가설된 옛 옥구선 철로와 현재 향교 진입로가 만나는 지점으로, 남아있는 남쪽 성벽을 그대로 활용하여 일부 철로를 가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문지와 동문지는 현재도 각각의 옆 마을과 이어주는 포장된 소로로 이용되고 있는데, 옥구읍성 당시의 성벽과 문의 위치를 추정해 볼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옥구읍성이 무너진 이후 이에 대한 관심도 많지 않아 점점 더 훼손이 심해졌다. 하루 빨리 성벽에 대한 정밀조사를 진행하여 옥구읍성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와 가치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읍성 중 가장 중요한 관아 건물은 객사로 대개 읍성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객사는 중앙 관리들의 숙소와 접대 장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옥구읍성의 객사는 1909년 전국에 있는 객사의 기능이 정지되면서 같이 기능을 상실하였고, 1930년대에 이르러 방치되었던 건물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적 지표조사에 의하면, 향교 남쪽으로 편평하게 넓은 대지가 계단식으로 조성된 지역이 객사터로 추정될 뿐이다.
읍성 중 객사 다음으로 중요한 관아 시설은 동헌으로 고을의 수령이 집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동헌 옆에는 아사(내아)가 있어 수령의 가족이 머무는 관사 역할을 담당하였다. 옥구읍성의 동헌은 옥구향교의 동쪽, 즉 상평초등학교 터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동헌은 1914년 옥구군청이 군산시내로 옮겨가면서 없어졌고, 해방 이후 상평초등학교가 지어졌으나 상평초등학교 마저 최근 폐교되었다.
이렇듯 옥구읍성 뿐 아니라 읍성 내에 자리하고 있던 중요한 관아 시설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안타까울 따름이다. 다만, 유일하게 남아있는 옥구향교를 통해 당시 옥구읍성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최근 옥구 소도읍 육성사업으로 옥구향교 진입로 공사가 진행되어 향교앞을 가로막고 있던 일제강점기 창고가 헐어짐에 따라 마을 입구에서부터 향교를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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