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는 코드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창조한다. 영화계의 천재들은 장르라는 익숙한 관습을 뒤집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크로니클>의 감독 조쉬 트랭크 역시 그렇다. 스물 여덟이라는 젊은 나이를 수식어로 붙이고 나면 이 전복에 대한 놀라움은 더욱 커진다. 이럴 때 영화사는 한 두 걸음이 아니라 성큼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크로니클>은 영상을 보고 영상을 통해 미래를 꿈꿨던 내츄럴 본 이미지 키드, 이미지 세계의 네이티브들이 만든 영화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크로니클>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학교 폭력, 가정 폭력으로 힘들어하던 한 소년이 어느 날 우연히 초능력을 갖게 된다. 따돌림을 당하는 소년은 미국 문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공포 영화의 새 문법이었던 <캐리>만 해도 그렇다. 아이들에게 놀림 받던 소녀 캐리는 어느 날 염소피를 뒤집어쓰고 가공할 염력을 뿜어내게 된다. 캐리가 놀림의 대상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바뀔 수 있는 동력은 바로, 하나, 분노였다.
무협지에서라면 이 분노는 스승의 죽음이나 부모의 죽음이었겠지만 <캐리>를 비롯한 미국의 십대 문화에서 분노는 따돌림에서 시작된다. 실화이기도 한 <볼링 포 콜롬바인>의 총기 난사도 여기서 멀지 않다. 문제적인 것은 <크로니클>이 단순히 따돌림 당하던 소년의 복수극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문제는 이 아이들이 초능력을 점점 키워나가면서 발생한다. 공을 던지던 아이들은 마트에 나가 카트를 당기고, 곰 인형을 공중부양시켜 아이를 놀래킨다. 물론, 아직은 귀여운 장난에 불과하다. 그런데 장난은 점점 더 짓궂어지고 아이들은 급기야 교통 사고까지 일으키게 된다. 하마터면 사람을 죽일 뻔 한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들 사이에서 일종의 협약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1. 공공 장소에서는 사용하지 않기, 2, 사람에게 쓰지 않기, 3. 분노했을 때 쓰지 않기 등의 협약을 맺는다.
세 사람은 초능력이라는 공통점으로 어울려 다닌다. 맷이나 스티브에겐 특별한 체험 정도이지만 늘 혼자였던 앤드류에게는 난생 처음 “친구”나 “동료”를 갖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친구가 생겼다고 해서 아버지의 폭력이나 어머니의 병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앤드류의 초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 문제는 아무 것도 없다. 아프다고 소리치는 엄마에게 진통제를 사다 줄 약값 조차 구할 수 없다. 아버지를 제어할 수도, 어머니의 고통을 덜어줄 수도 없는 초능력이라면 도대체 어디에 가치가 있을까? 이후, 영화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가 된 앤드류의 분노를 보여준다.
주목해야 할 것은 십대의 감수성을 쫓아가는 감독의 영화적 기술이다. 감독은 줄곧 셀프 카메라 형식을 이용해 아이들의 세계에 잠입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스크린에서 보는 것은 모두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한 장면이다. 핸드 헬드와 페이크 다큐멘터리가 복합된 장르는 마지막 순간 화자, 시선을 바꾸게 된다. 아이들이 선택한 장면이 아니라 CCTV나 언론사의 카메라에 잡힌 장면들로 말이다. 자신의 변화를 기록하던 시선은 재난을 담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대체된다. 아이들의 초능력이 발견에서 재난으로 뒤바뀐 것이다.
카메라와 시선의 이동은 소설로 치자면 화자의 변주만큼이나 흥미롭다. 유연한 위치 이동을 통해 감독은 십대의 심리와 초능력의 세계를 입체화하는 데 성공한다. 여기서 초능력은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성장의 혼돈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무릇 성장이란 이렇게 고통스러운 변이 과정이란 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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