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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화를 신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신발이 얼마나 무겁고 견고한지. 나는 신어보진 못했지만 동생의 군화를 들어봤고 눌러봤고 냄새도 맡아봤다. 겨우 그 정도만 해보았지만, 그 ‘신발’이 ‘무기’가 될 만한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니, 차고도 넘칠 정도로 위험해 보였다.
그 군홧발이 민중을 짓밟았던 때가 있었다. 군홧발의 배후는 그들을 폭도로 몰아 모욕했지만 그들은 결단코 폭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농민이었고, 상인이었고, 노동자였으며, 학생이었고, 샐러리맨이었다. 그들은 노인이었고, 임산부였고, 아이였으며, 우리들 중 누군가의 가족이자 이웃이었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르겠다.
“에이, 또 광주야?”
그러나 이런 식의 참담한 역사를 가진 우리들이 끊임없이 광주를 이야기해아 하는 것은 숙명과도 같다. 그토록 끔찍한 사건으로 우리 현대사에 씻을 수 없는 얼룩을 만들어버린 죄인들은 제대로 단죄조차 하지 못한 채(어쩌면 하지 않은 채) 30여 년 전의 그 시절로부터 단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권여선의 소설 ‘레가토’는 그 시절 그날, 바로 그 곳으로 뛰어든 뒤 행적이 묘연해진 여자를 그녀의 딸이, 어머니가, 친구들이 더듬더듬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녀의 그날의 행적에 대해서까지 전혀 예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고 있는 독자 누구나가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그들 역시 그녀의 행적을 조금쯤은 짐작하고 있다. 심지어 그날 그 곳에서 그녀를 목격한 사람도 여럿이었다. 다만, 그 이후의 그녀, 봄날의 나뭇가지처럼 연하디 연한 대학 새내기에서 느닷없는 임신으로 어린 엄마가 된 뒤 하루 아침에 투사가 되어 자신의 온 몸과 마음을 연소시킨 뒤의 행적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사실 그녀는 다른 신입생들과 다를 바 없이, 그곳이 무엇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인가도 정확히 모르는 채 전통연구회를 찾아갔고 그 동아리의 일원이 되었다. 시작이 그랬던 만큼 선배들의 독려 아래 처음 피쎄일을 하던 날, 우연히 마주친 사복 경찰 하나에도 그녀는 자신을 컨트롤하기 힘들 만큼의 두려움을 느꼈다. 그랬던 그녀가 그날로부터 일 년 뒤에는 망설임 없이 광주로 뛰어든 것이었다. 그때 그녀는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핏덩이 아이를 두고, 아기에게 물려야할 젖을 물리지 못해 불어터진 젖이 흘러 옷을 적시는 몸으로 그곳에 거듭해서 뛰어들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이후 그녀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나는 언제나 그것이 궁금했다. 무엇과 직면했을 때라야 인간이 신념에 목숨을 걸 수 있게 되는 것일까. 권여선의 이 소설은 ‘에이, 또 80년 광주야?’하고 그냥 넘어가도 좋을 이야기를 담고 있지가 않다. 이 소설은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의 시절을 위해 우리들이 불러줘야만 할 영가이며, 동시에 그 시절을 충분히 위로하지 못한 점에 대한 속죄이며, 그 시절을 빌미로 이제는 저마다 군홧발보다 무겁고 견고한 ‘한 자리’ 씩을 차지하고 앉아 그 시절의 위정자 흉내를 내고 있는 이들에 대한 분노인 것이다. 게다가 광주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누군가는 까마득한 타워크레인 위에서 309일이나 목숨을 건 농성을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용역깡패들에게 무참히 두들겨 맞아 초주검이 되었으며, 누군가의 꽃 같은 딸들은 단지 열심히 노동한 대가로 치명적인 병을 얻었으며, 바로 이 아침에 어느 노파는 평생 농사를 지어 새끼들을 키워낸 땅을 지키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시위현장으로 나가고 있다. 나와 당신이 ‘제대로 알고’ 알게 된 사실들에 대해 ‘뜨겁게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30년 전의 그녀보다 훨씬 더 외로운 선택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한 시절과 다른 한 시절을 이토록 섬세하고 따뜻하게 이어준 이야기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젊은 소설 읽기’란 주제에 부합하는 것인지, 나보다 연배가 높으신 데다 등단 연차 또한 오래 되신 권여선 선배의 소설을 소개하기로 마음먹으면서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의 소설 ‘레가토’야 말로 ‘젊은 소설’ 그 자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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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