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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영화의 핵심은 공포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공포일까? 결국 그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라고 말할 수 있다. 공포 영화에서 최악의 결말이 있다면 바로 “죽음”이다. 공포 영화 속 인물들은 죽음을 피해 달아나고, 죽음의 위협 때문에 떤다. 결국, 문제는 어떻게 죽느냐이다. 우리가 공포 영화를 나누는 장르적 기준도 역시 어떻게에 따라 나뉜다. 비합리적이며 초월적 존재가 죽음을 불러오면 오컬트, 칼이 난무하면 슬래셔, 피와 내장이 화면을 뒤덮는다면 하드 고어, 이런 식으로 말이다.

   
 
중요한 것은 공포 영화가 단순히 “어떻게”에 집중할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주제는 멀찌감치 도망가고 잔혹하고 불편한 장면들만 넘쳐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포영화만큼이나 어떻게와 왜의 결합이 중요한 장르도 드물다. 그런 점에서 「살인소설」은 제목이 암시하는 바처럼 스릴러가 있는 공포 영화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스릴러란 무엇인가? 바로 긴장과 서스펜스이다. 무언가 비밀이 있는 듯한 불편함, 어떤 중요한 사건이 발생할 듯한 긴장감이 바로 서스펜스이다. 「살인소설」은 살인 사건이 일어났던 곳에 이사간 소설가라는 발상을 통해 이 서스펜스의 시작을 알린다.

소설가는 <텍사스 블러드>라는 책을 써서 범죄 소설계의 총아로 떠오른다. 하지만 그것도 이미 꽤 오래 전일 후속작은 그만한 영예를 누리지 못하고 그는 점점 문단의 잊혀진 존재로 변해간다. 절치부심 끝에 대단한 작품을 구상하기 위해 그는 과감한 선택을 한다. 그것은 바로 일가족 네 명이 기괴한 방식으로 살해당한, 사건현장으로 이사한 것이다.

문제는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아내와 두 아이들에게 사실을 숨기고 그저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서라며 이사의 이유를 숨긴다. 그런 점에서, 「살인소설」은 명작을 쓰겠노라며 타자기를 노려보고 있는 「샤이닝」을 떠올리게 한다. 아버지 역을 맡은 에단 호크는 잭 니콜슨처럼 전전긍긍하고, 애타한다. 좋은 소설을 써서, 제 2의 도약을 이루고 싶지만 쉽지 않다. 그 때 유혹처럼 8밀리 기록 테이프를 발견하게 된다. 그 테잎 안에는 끔찍한 일가족 살해사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남자는 그만두어야 옳다는 것을 알지만 혹시나 모를 서사적 영감을 기다리며 영상에 매달린다. 그것이 불행의 초대장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비디오 영상을 발견한 이후 사건은 하나 둘 씩 공포의 중핵을 향해 달려간다. 조용한 한 밤중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려오고, 도시에서 건강했던 첫 째 아들이 야경증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분명 멈춰두었던 영상이 저 혼자 상영되기도 하고, 모두 불태웠던 필름들이 멀쩡하게 책상위로 돌아와 있기도 한다. 그렇다. 「살인소설」은 살인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풀어가는 스릴러가 아니라 불가해한 살인 사건을 재구성하는 미스테리 영화에 가깝다.

문제는 사건의 원인이 현실이 아닌 초월적 공간으로 넘어서는 순간 영화의 발상에 기시감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비디오를 보고 난 이후 연쇄적으로 벌어지는 살인 사건, 사실 이 서사는 이미 우리가 일본 소설과 영화 「링」에서 확인한 설정이기도 하다. 감독은 스스로 「링」에서 영감받았음을 말한다. 하지만 어쩐지 「살인소설」에서의 초월적 살인마 부기맨은 「링」의 사다코만큼이나 놀랍지도 그렇다고 두렵지도 않다. 이미 사다코의 아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대개 스릴러를 바탕에 둔 호러물들은 마지막 반전에 큰 힘을 싣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반전이란 무지에서 앎으로의 이행을 포함한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앎이 인생의 행로를 바꾼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반전은 이야기하기, 그러니까 플롯 가운데서 발생해야만 제대로된 반전이 될 수 있다. 만일, 반전이 관객을 놀래키는 데 중점을 둔다면 그건 반전이라고 부를 수 없다. 「살인소설」의 반전이 그다지 새롭거나 놀랍지 않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모든 장르 영화들이 그렇지만 특히 공포 영화는 더더욱이나 새로운 자극을 주기 어렵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것, 이 어려운 경계 가운데서 진짜 공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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