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걷는데 제격인 가을이다.
한 여름 이글거리는 태양은 저만치 힘을 잃었고, 구수한 내음을 풍기는 길가의 누런 풀잎, 그리고 산들바람은 세상 그 누구도 걷기 싫다는 핑계를 대지 못할 정도로 매혹적이다. 걷기는 무척 단순하고 소박하다. 등산 갈 때처럼 멋들어진 등산복도, 지팡이도 필요 없다. 허접한 운동화여도, 펑퍼짐한 운동복을 입어도, 하물며 푸석한 얼굴로 걷기에 동참해도 부끄러움이 없다. 그저 걷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행복해진다.
산티아고는 예수님의 제자인 성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이다. 팔레스타인에서 순교한 후 시신이 스페인 북부 갈리시아 지방에 묻혔고, 현재는 그의 이름을 딴 Santiago de Compostela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스페인의 수호신으로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분이다. 산티아고에 대한 유럽인들의 사랑은 수 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3세기부터 유럽인들은 신을 만나기 위해 프랑스의 St. Jean Pied-de-Port (생장삐에드포르)에서 장장 800 km를 걸어 산티아고를 찾아 소원을 빌고 성야고보의 시신을 만나는 순례의 길을 행했다. 옛날엔 구원을 얻기 위해 산티아고 순례길에 나섰다면 요즘은 내 속의 “나”를 만나기 위해 산티아고 길을 걷는다.
내가 비의 도시, 학문의 도시 그리고 순례자의 도시인 산티아고에 처음 간 것은 2001년 1월였다. 번민 끝에 유학길에 올랐는데 스페인였고, 거기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학교였다. 산티아고 순례자에게는 조개껍질을 증표로 주는데 바로 패류를 공부하러 거기까지 간 것이다. 당시 유럽 여행이 처음였던 나에겐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 순례의 길였다. 파리에서 TGV를 타고 프랑스-스페인 국경도시인 Hendaye에 도착한 다음, 옛날 순례자들은 걸어서 30-40일이 걸리던 길을 난 기차로 10여 시간을 달려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6명이 한 칸에 들어가는 싸구려 기차에 홀로 앉아 불안과 설레임 속에 기차에서 새벽을 맞던 기억이 새롭다. 산티아고 성당의 “영광의 문”에 손을 얹고 다섯 가지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성야고보 동상의 어께에 팔을 올리고 기도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 가지만 빼고 다 이룬듯하다. 이정도면 꽤나 영험한 성당이 아닐까?
요즘처럼 가을이 되면 걷고 싶다. 특히나 공부하느라 마음 졸이며 살았던 산티아고를 가족과 함께 걸어가고 싶다. 산티아고 포도밭 시골길을 아내와 아들이 사이좋게 걷는 뒷모습을 보고 싶다.
이메일로 받아보세요
지금 뉴스레터를 구독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