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 송경동
창작과비평(2009)
시는 삶과 무관하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시 쓰기는 법적 최저 생계비도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 아닌 노동이며, 철학적으로 보면 시적 상상력은 사회 구성원(politeia)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내재적 진리를 방해하는 모방적 사유, 즉 사유의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송경동의 시를 읽다보면 그것이 우리의 착각이었음을 문득 깨닫게 된다. 자본의 기획에서 소외된 노동인 시 쓰기를 통하여 ‘시인-노동자’로서 그는 자신과 같은 고통스러움을 겪어 내고 있는 개별자들의 삶을 기꺼이 담는다. 따라서 송경동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우리의 내면으로 깊이 찌르고 들어오는 삶의 고통스러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와 같다.
현실의 자본은 무차별적인 상품화의 논리를 앞세워 발전이라는 절대 목표를 사회 구성원들에게 심어주는데 성공한다. 이제 “양장 고운 「체 게바라 평전」”도 “3년째 천막농성을 하다 구속당한/전자공장 여성노동자들의 안부와 무관하게” “불티나게” 팔리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 해 늦은 세 번의 장마」). 이 속에서 우리들은 일상의 얼굴이어야 할 노동의 현장을 삶의 뒷면으로 기꺼이 유배시킨다. 그리고 자본의 기획은 우리가 만든 이 노동의 뒷면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신의 문제점-본질을 투기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이 문제점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쓰레기장은 실상 우리 스스로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송경동의 시가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다면 이렇게 우리 스스로 유기시킨 노동의 현장이자 자본의 뒷골목을 시적 언어로, 아니 잊혀진 현실의 언어로 길어내려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만들어내는 이 시적 현실은 그대로 객관적인 노동의 장면에서도 빛을 발한다. 이를 통해 시인은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현실들을 불러낸다. 예를 들어 3부에 묶인 11편의 시들은 각각의 부제들이 지칭하는 것처럼 위장폐업을 한 회사에 맞선 노동자들, 진압경찰에게 죽임을 당한 노동자, 노점상 철거에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점상인, WTO 세계각료회의 반대 시위나 한미 FTA 반대시위에서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열사 등 구체적인 개인의 이름들에 바쳐진 시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각각의 시편들이 다루고 있는 현실을 이야기 하는 것은 다소 무의미하다. 시의 말미에 설명까지 붙어 있는 주인공들의 사연을 이야기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것들을 이야기할 때 오히려 시적 진술의 효과는 반감되기 때문이다. 보다 중요한 출발은 시인이 이들을 잊지 않고 되살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을 살아가는 주체들은 시인의 호명과 추모의 과정에 동참하여 자신의 기억을 죽은자들의 그것과 일치시켜 보게 된다. 이럴 때 기억의 주체들은 현대 자본의 논리에 덮여있던 단수화(單數化)된 주체에서 벗어나 복수성의 주체 그대로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를 민중적 연대라고 쉽게 말하지 않기로 하자. 시인의 말 그대로 “무엇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합리성을 기반으로 한 목표 세우기는 이미 자본의 논리가 마련한 출발점에 서는 일처럼 “의아하면서도 갸우뚱할 정도로 치사한” 일이다(「경계를 넘어」에서 재구성). 따라서 시집의 제목과는 달리 송경동의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에는 시인의 답보다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가득 차 있다. 때로 그 질문은 “어떤 탈주도 꿈꾸지 않고 복종하겠다는 가장 확실한 약속”을 하는 “비겁”한 “돼지”같은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비판이며(「도살장은 무죄다」), “학교폭력은 안되지만, 한 남성으로/원조교제는 싫지 않”은 나의 내면에 살고 있는 일상의 괴물에게 던지는 축사(逐邪)이다(「당신은 누구인가」). 부디 송경동의 이런 질문이 거듭되지 않는 사회가 오기를 진심으로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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