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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시 비평과 시 연구를 위한 제언(提言)

김의한 선임기자
- 67분 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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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말이 돌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나. 아마도 90년대 이후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시의 시대'라고 불리기까지 하였던 영광과 오욕의 저 80년대를 거쳐, 동서독의 통일과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문을 연 90년대의 한국문학은 시보다는 오히려 '소설의 시대'였다. 한국문학, 그 중에서도 비평 분야의 고질적인 관습 중의 하나라고 보아야 할 '세대론적 인정투쟁'에 관한 논의는 이 자리에서 접어두고서라도, 90년대로 접어들면서 우리 소설이 여러 갈래의 복잡다변한 양상을 보여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굳이 이름을 열거하지 않더라도, 90년대 소설의 초중반을 장식하고 있는 후일담 소설이 그 한 단면을 이룰 것이며, 후일담 소설을 거쳐 현대 한국 여성주의(Feminismus) 소설의 개척자로 일컬어질 공지영의 성과와 한계, 이와는 또 다른 지점에서 여성의 내면과 한계적 상황 및 갈등의 목소리에 집중해온 신경숙 ․ 은희경 ․ 전경린 ․ 공선옥 ․ 하성란 ․ 조경란, 특유의 시적인 문체와 몽환적 분위기를 바탕으로 인간 존재의 심연과 고뇌를 깊이 있게 그려온 윤대녕과 장정일을 필두로 하여 하일지 ․ 하재봉 ․ 김영하 ․ 김연수 ․ 백민석 그리고 배수아 등, 기존의 소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노골적인 성애묘사와 소설형식의 실험을 바탕으로 기성세계의 가치관의 전복과 붕괴, 단편적인 인간관계 및 일회성의 파편적인 삶의 묘사 등 새로운 세대의 인생관과 생활방식을 주제로 한 90년대 소설계의 첨예한 화두 가운데에 자리했던 이른바 ‘신세대 문학’의 작가들, 한창훈 ․ 전성태 ․ 김종광 등 향토정서에 기반을 둔 해학과 풍자의 세계와 최윤과 마르시아스 심(심상대)와 같이 특정한 범주 안에 들어가지 않는 독창적 소설세계를 펼쳐 보인 적지 않은 수의 여성 ․ 남성 작가들과 중진 ․ 원로작가들에 이르기까지, 80년대를 '시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면 90년대는 가히 '소설의 시대'였다고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90년대를 지나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더 첨예화되는 양상을 보이는 듯한데, 단적으로 문학비평에 있어 시 비평보다는 소설 비평이 양적인 면에서 그 비교 우위를 점하고 있으며, 해가 거듭할수록 신문사의 신춘문예와 각종 문예지 신인상의 문학평론 부문에 응모작 수도 소설 비평이 시 비평을 능가하고, 당선작에 있어서도 소설 비평이 더 많은 추세를 보인다. 90년대로 넘어오면서 등장한 비교적 젊은 문학평론가들의 특징과 근래 비평문학의 한 가지 주목해야 할 현상으로 나는 시 비평과 소설 비평의 분할을 꼽고 싶은데, 과거 60년대산 비평가들, 더 구체적으로『창작과비평』의 백낙청 ․ 염무웅,『문학과지성』의 김주연 ․ 김현 ․ 김치수 ․ 김병익,『세계의문학』의 김우창 ․ 유종호를 비롯하여, 70년대와 80년대의 많은 비평가들이 시 비평과 소설 비평을 겸업한 데 비해, 90년대 및 2000년대에 등단한 젊은 문학평론가들의 경우 시 비평과 소설 비평을 나누어서 하는 이른바 '시 전문 평론가', '소설 전문 평론가'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요즈음 문학비평의 한 현주소로 나는 꼽고 싶다. 이러한 경우 거의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본인의 전공이 시인 경우에는 시 비평만을, 소설인 경우에는 소설 비평만을 행하고 있는데, 문학비평에 보다 전문화 ․ 내실화를 기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일면 긍정적인 면모를 가진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마치 시 독자, 소설 독자가 따로 있는 것처럼 분화한 비평 풍토가 문학을 크게 조망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은 우려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시대의 중심 장르에서 비껴지기 시작한 감이 있는 시 ․ 시인론"의 영향으로 인해서인지, 상대적으로 시 비평이 소설 비평에 비해 양적 ․ 질적인 하락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일기도 한다.

그렇다면 시 비평의 질적 하락의 근거는 어디에서 보았는가.

나의 경우, 2000년대 중반의 황병승 시인을 필두로 내세운 소위 '미래파 논쟁'에서 그 근거의 한 단면을 보았음을 말하고 싶다. 황병승이라는 젊은 시인과 비슷한 시기에 등단하여 작금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몇몇 젊은 시인들을 일컬어 '미래파'라 칭한 권혁웅 한양여자전문대학 교수와 이장욱 조선대 교수를 비롯 '미래파'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들을 향후 한국 시단을 이끌어나갈 차세대 시인군(群)으로 평가하고 옹호한 논자들과, 이와는 반대선상에 자리하여 상대적으로 비판적 입장에서 비평을 써내고 있는 하상일 동의대 교수 ․ 고명철 광운대 교수 등 이른바 '서정옹호파'들이 벌인 논쟁에서, 나는 소설 비평에 비해 질적으로 하락한 시 비평의 한 스산한 풍경을 보았다는 생각이다.

1990년의 시작과 더불어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 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을 외치며 등장한 아담의 장정일과, 90년대의 한가운데에서 "1793년에 제작된 다비드의 유화,「마라의 죽음」을" 보면서 시작되는 자살 안내인의 신선하면서도 충격적인 소설『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김영하를 기수로 하여 펼쳐졌던 90년대 한국소설의 한 사건인 저 '신세대 문학'에 관한 논쟁이 비교적 생산적인 논쟁의 장을 이룩하며 논쟁의 대상이 된 작가들은 작가들대로 소설적 발전을 이룩하고 이와 맞물려 새로운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적절한 호응도 이끌어냈던 바를 기억할 때 — 실제로 김영하와 김연수는 현재도 한국 작단의 가장 촉망받는 젊은 소설가들이 아닌가. 비록 지금은 절필했다고는 하나 백민석도 같은 범주에 둘 수 있을 것이다. —, 우리 시단의 2000년대 중 ․ 후반을 장식했던 '미래파 논쟁'은 아쉬움을 이모저모 남길 수밖에 없었던 듯싶다.

그렇다면 뭐가, 어떤 부분이 아쉬웠나.

단적으로 이들의 견해 중 가장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것은, 먼저 미래파 옹호론자들의 경우 의미론적으로 모호함을 넘어 난해함의 극치를 이루면서 통사론적 구조 또한 아무렇지 않게 파괴하는 시들을 두고 '재미있다'고까지 말하면서 속칭 미래파의 시들을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에서 두루 살피지 못한 탓이며, 서정옹호론자들의 경우에는 미래파라고 불리는 시인들의 시가 난해하고 어려운 내용을 갖췄다고 하여 그것을 서정의 파괴, 독자와의 괴리 등을 이유로 좋지 못한 시라고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상일 교수의 경우『생산과 소통의 시대를 위하여』라는 저작 중 한 시인론을 다루면서 "서정이 좋다"라고 노골적으로 서정애호 취향을 드러내 보이는데, 서정옹호파의 많은 경우가 이처럼 기존의 익숙하고 관습화 되다시피한 서정시(Lyrik)에 집착하면서 이와는 형태와 형식이 다르고 내용도 모호하고 난해한 미래파의 시편들에 대해, 이것이야말로 현재 시를 독자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라고 지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과연 그럴까. 정말 시가 단지 어렵고 의미가 잘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에서, 기존의 서정시와 견줄 때 미래파의 시편들은 의미가 별반 없거나 혹은 말장난, 독자들에 대한 그럴듯한 눈속임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즉각적인 이해가능성"을 만족시킬 수 없거나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시들이라고 해서 난해시라는 손쉬운 용어로 울타리를 친다면 정작 속이야 편하겠지만 문학이라는 동네에 근접할 자격을 스스로 박탈해버리는 일이"라는 것을 서정옹호파들은 혹시 망각한 것이 아닐까. 더 대놓고 말해, 이들은 혹여, 애초부터 미래파의 시들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데 솔직히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닐까. 그들의 문학적 식견이나 비평적 재능이, 그만한 시들에 관한 정교한 한 편의 비평문을 작성할만한 능력이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들이 어렵다고 말하는 저 미래파의 시들을 아예 싹 덮어놓고 부정하고 부인하는 것은 혹시 아닐지. 그만큼 그들의 저서에서 미래파 및 그 밖의 이러저러한 난해시(難解詩)에 관한 정치한 시 비평문을 만나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미래파 옹호론자들의 경우에는 앞서 말한 대로 어렵고 난해한 경우가 대부분인 미래파 시인들의 시를 두고 '재미있다'라고까지 표현한 적이 있는데 이를 달리, 그래 좀 더 속을 열어놓고 보면 그 안에는 보다 우월한(?) 속내가 배면에 깔린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고백하자면 이들이 재미있다, 새로운 시다, 라고 말하는 몇몇 시인들의 시편들을 읽는 동안 한 번에 바로 이해가 되지는 않을지언정 누차 반복해서 읽으면 이해가 어떻게든 되는 시편들이 있었는가 하면, 정말 골머리를 싸매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읽고 추론하고 다시 반복을 해야만 겨우겨우 그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시편들도 솔직히 내게는 있었다. 결코 재미있지도 쉽지도 않았으며 당연히(!) 이러한 시편들을 써내는 시인들이 차세대 우리 시단을 이끌어나갈 시인들이라는 생각에 동의하기란 어려웠다.
그런데 왜 하필 미래파 논쟁인가. 이미『문예중앙』2007년 봄호 특집 :「미래파, 그 이후」에서 권혁웅 교수가 '미래파는 없다'라고 선언하며 그동안의 논쟁에 마침표를 찍지 않았는가. 그러나 미래파 논쟁은 어찌어찌 끝났을지 몰라도 그 경향과 여파는 아직도 여전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즈음의 시는 '너무' 어렵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 나는 시가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이 90년대로 접어들면서부터라고 전술하였으나, 2000년대를 넘어서면서부터 우리 시는, 그 중에서도 젊은 시인들의 시편들은 너무 어려워진 것 같다.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나는 최근의 신춘문예 당선시편들을 몇 편 읽어나가려 한다. 이런저런 논란이 일고 있으나, 아직까지 신춘문예는 미등단의 신인들에게는 가장 촉망받는 문인 등용문이고 여타의 문예지 신인상에 비해 월등히 많은 편수의 응모작들이 응모되고 있기에, 그 당선 시편들의 면모를 살펴봄으로써 미래파 논쟁 이후에 등단한 젊은 시인들의 시편들은 어떠한지, 이들의 시 역시 난해성과 서정성 등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지, 그렇다면 이러한 시들을 읽을 때 문학평론가 및 문학연구자들은 어떠한 자세를 견지하면 좋을지에 관해서 등, 부족한 필력이나마 한 번 시도해보려고 한다.

2


그에게는 계급이 없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좁은 동굴이며
구름의 속도로 먼 길을 걸어온 수행자입니다
궤도를 이탈한 적 없는 그가 걷는 길은
가파른 계단이거나 어긋난 교차로입니다
지하철에서부터 먼 풍경을 지나
검은 양복 즐비한 장례식장까지
그는 나를 짐승처럼 끌고 왔습니다
오늘 나는 기울기가 삐딱한 그를 데리고
수선가게에 갔다가 그의 습성을 알았습니다
그는 상처의 흔적을 숨기기 좋아하고
내가 그의 몸을 닳게 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와 정면으로 마주한 적은 없지만
가끔 그는 코를 치켜들기 좋아합니다
하마의 입으로 습기 찬 발을 물고 있던 그가
문상을 하러 와서야 나를 풀어줍니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마음으로 그를 만져보니
새의 날개 안쪽처럼 바닥이 움푹 파였습니다
두 발의 무게만큼 포물선이 깊어졌습니다
그의 입에 잎사귀를 담을 만큼
소주 넉 잔에 몸이 가벼워진 시간
대열에서 이탈한 코끼리처럼
이곳까지 몰려온 그들이 서로 코를 어루만지며
막역 없이 어깨를 부둥켜안고 있습니다
취한 그들이 영정사진처럼 계급이 없어 보입니다
그가 그에게 정중한 인사도 없이
주인이 바뀐 지도 모르고
구불구불 길을 내며 집으로 갑니다


201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김성태 시인의 시「검은 구두」는 구두를 ‘그’라는 3인칭 대명사로 의인화하여 시상을 전개해나가고 있는 작품이다. 일단 서두에서 거론한 견해에 입각해볼 때, 거칠지만 이 시를 ‘쉬운 시’의 계열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딱히 이해가 안 되거나 어려운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좁은 동굴”인 구두는 “궤도를 이탈한 적이 없”다. 일종의 모순어법(Oxymoron)으로 보아도 될법한 ‘세상에서 가장 좁은 동굴’의 경우, 동굴의 어두침침함과 가없음에 ‘세상에서 가장 좁은’이라는 형용사구를 더해 그 구두를 신는 구두 주인의 답답한 발을 알 수 있게 하고 답답한 발은 그 발로 세상을 딛고 서고 걸어야 할 구두 주인의 심리적 책임감과 부담감을 짐작하게 한다. 여기에 ‘궤도를 이탈한 적이 없’다는 표현이 맞물려 구두 주인이 우리 주변의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시민적 생활인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 구두를 신은 이가 걷는 길은 “가파른 계단이거나 어긋난 교차로” 등이며, “지하철에서부터 먼 풍경을 지나” 구두 주인이 가는 곳은 “검은 양복 즐비한 장례식장”이다. 종일 주인을 피곤하게 했던 구두는 “문상을 하러 와서야” 비로소 주인을 풀어준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마음”, 애처로운 마음으로 자기를 지탱시켜준 구두를 “만져보니” “새의 날개 안쪽처럼 바닥이 움푹 파”여 있는, “두 발의 무게만큼 포물선이 깊어”져 있음을 본다. 시에서 새는 주로 공활한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자유로움의 상징임을 감안할 때, 이 새와 대등한 위치에 놓인 구두 역시 어디로든 마음대로 가고 누빌 수 있는 자유로움의 한 표상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 시적 주체의 ‘궤도를 이탈한 적 없는’ 삶의 동반자로서의 구두는 자유의 상징이 아니라 일관되고 비좁은 한 소시민의 피곤하고 괴로운 현실의 다른 얼굴일 뿐이다. 하여 그가 꼬깃꼬깃 눌러 신은 구두의 바닥은 움푹 파인채로 깊디깊은 포물선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문상간 곳에서 시적 화자가 “소주 넉 잔에” 위안을 받는 동안 피곤한 주인을 이끌고 상가(喪家)로 온 구두들은 그들끼리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에 빠진다. 구두의 주인들은 제각각 다를지라도 그들을 받치고 선 구두만큼은 “영정사진처럼 계급이 없어”보이는 수평적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구두는 문상을 올 때의 주인과 갈 때의 주인이 바뀌기도 하면서 왔던 길을 다시 “구불구불 길을 내며 집으로” 돌아간다.
시의 제목은 ‘구두’도 아니고 ‘검은 구두’인데 왜 시인은 이 시의 제목을 그냥 ‘구두’가 아니라 ‘검은 구두’라고 정한 걸까. 이 시를 통해 관습적으로 짐작할 수 있는 시적 주체의 모습이 단지 앞서 내가 기술한 것처럼 평범한 일상생활을 하는 소시민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넥타이 매고 정장 입고 구두 신고 직장 다니는 이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하여 그러한 무리에 속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발에 신는 것이 검은색 색상의 구두여서 시 제목에 ‘검은’이라는 지극히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형용사를 붙인 걸까. 시인은 이런 단순한 발상으로 시의 제목을 ‘구두’가 아닌 ‘검은 구두’라고 정한 것이 아니다. 독일 현대 시문학작품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파울 첼란(Paul Celan)의「죽음의 둔주곡(遁走曲)」(Todesfuge)에서 첼란이 시적 주체인 ‘우리(wir)’가 마시는 생명수와도 같은 ‘새벽의 우유(Milch der Frühe)’를 그냥 ‘우유(Milch)’로 표현하지 않고 ‘검은 우유(Schwarze Milch)’로 표현함으로써 시적 주체들이 속한 암울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효과적이고 실질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듯이 문학작품, 그 중에서도 시문학작품에서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는 ‘검은’이라는 색채 수식어를 ‘구두’ 앞에 붙여 ‘검은 구두’를 만듦으로써 시의 본격적인 서술로 접어드는 7행의 ‘검은 양복’과 더불어 시적 상황의 주요배경인 ‘문상’의 분위기에 보다 무게와 깊이를 더해 시상을 전개해나갈 수 있었다고 본다.

골목은 동굴이다
늘 겨울 같았다
일정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었다
누군가 한 사람만 익숙해진 것은 아니었다
공용 화장실이 있는 방부터
베란다가 있는 곳까지, 오리온자리의
1등성부터 5등성이 동시에 반짝거렸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표현처럼
구멍가게는 진부했다 속옷을 훔쳐가거나
창문을 엿보는 눈빛 덕분에
골목은 활기를 되찾기도 했다
우리는 한데 모여 취업을 걱정하거나

청춘보다 비싼 방값에 대해 이야기했다
닭다리를 뜯으며 값싼 연애를 혐오했다
청춘이 재산이라고 말하는 주인집 아주머니 말씀
알아들었지만 모르고 싶었다
우리가 나눈 말들은 어디로 가 쌓이는지
궁금해지는 겨울 초입
문을 닫으면 고요보다 더 고요해지는 골목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인기척에 세를 내주다가
얼굴 없는 가족이 되기도 했다
전봇대, 우편함, 방문, 화장실까지
전단지가 골목의 각질로 붙어 있다 붙어 있던
자리에 붙어있다 어쩌면
골목의 뒤꿈치 같은 이들이
균형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굳어버린 희망의 자국일 것이다


2010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강윤미 시인의「골목의 각질」역시 앞서 읽은 김성태 시인의「검은 구두」처럼 쉽게 읽히는 ‘쉬운 시’이다. ‘좁은 길’을 뜻하는 ‘골목’과 깊고 넓은 큰 굴을 뜻하는 ‘동굴’, 곧 ‘골목은 동굴이다’로 시작되는 시의 제1행은 앞서 읽은 김성태 시인의「검은 구두」의 제2행인 "세상에서 가장 좁은 동굴"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모순어법(Oxymoron) 내지 역설법(Paradoxon)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역설의 골목은 “늘 겨울 같았다”고 시적 화자는 말한다. 비단 “한 사람만 익숙해진 것”이 아니라, “공용 화장실이 있는 방부터 베란다가 있는 곳까지” 거기에 머물렀던 이라면 “일정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는 저 동굴 같은 골목의 “고요보다 더 고요”한 분위기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그런 곳이다. 간혹 “속옷을 훔쳐가거나/창문을 엿보는 눈빛 덕분에” “활기를 되찾”을 만큼 폐쇄되고 정적인 이곳에서 시적 화자와 화자가 포함된 시적 주체인 ‘우리’들은 청춘의 소중한 한 때를 보내고 있는데, 그 소중한 청춘의 한 때라는 것은 그러나 뚜렷한 계획과 목표를 중심으로 희망차고 포부 있는 내일에의 청사진을 펼치는 한 때가 아니라 차라리 암울과 우울로 점철된 회색빛 일기장의 엉성하게 찢어진 페이지와도 같은 한 때이다. 이 시「골목의 각질」은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명확한 등장인물들은 나오지 않을지라도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물군상들의 상항과 정경을 일정한 이야기(story)를 지닌 채로 서술하고 있어 이를 넓은 의미에서는 한 편의 ‘이야기 시(譚詩, Ballade)’의 양식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 시를 읽는 독자라면 한 번쯤은 가져볼만한 의문으로 명확한 하나의 이야기 줄기를 시 속에서 지속적으로 서술해나가던 시인이 왜 시의 1절의 12행 “우리는 한데 모여 취업을 걱정하거나” 이후에 곧장 다음 행을 이어서 서술하지 않고 13행 “청춘보다 비싼 방값에 대해 이야기했다”로 2절을 만들었는가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한국 ‘이야기 시’의 대표작 중 한 편으로 꼽을 수 있을, 하여 임철우 작가에 의해서「사평역」이라는 제목으로 소설화되기도 하였던 곽재구 시인의 저 시리도록 아름다운 서정의 시「사평역에서」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더욱 그러할 텐데, ‘사평역’이라는 가상의 한 공간에서 여러 인물군상들의 겨울 역사(驛舍)와도 같은 춥고 스산한, 쓸쓸한 삶의 풍경과 내면들을 곽재구 시인은 하나의 시절(詩節, Strophe) 안에 일관되게 담아내며 분절되지 못할, 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에는 같은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우리네 인생과 이웃들을 한국시사(詩史)에서 다시 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묘사해내지 않았는가. 충분히 한 절 안에 서술할 수 있었을 작품을 구태여 왜 두 절로 나눈 걸까. 이에 관해 의문을 가질법한 독자라면, 그렇다면 12행 “우리는 한데 모여 취업을 걱정하거나” 이후에 곧장 다음 행으로 읽어나가지 말고, 그에 앞서 한숨을 한 번 푹— 하고 쉬어보는 건 어떨까. 12행 “우리는 한데 모여 취업을 걱정하거나” 이후에 후— 하고 가슴 안 저편 깊은 곳에서부터 진정으로 솟아 올라오는 숨결에 속안에 쌓인 부담과 절망과 슬픔과 미움, 두려움 같은 저간의 모든 것들을 다 얹어서 한 번, 깊디깊은, 한숨을, 다음 13행으로 바로 읽어 내려가기 전에, 푹— 혹은 후— 하고 몰아쉬어보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어지는 13행 “청춘보다 비싼 방값에 대해 이야기했다”를 읽어본다면, 이 시의 지은이가 왜 한 절 안에 이야기를 다 담아내지 않고 두 절로 나누어 시를 서술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닭다리를 뜯으며” ‘우리’라고 하는 시적 주체들은 “값싼 연애를 혐오했다”고 하는데 이는 일종의 반어(Ironie)가 아닐는지. 하루 빨리 이 정체된, 저당 잡힌 청춘의 유형지와도 같은 이 답답한 골목을 벗어나 직장을 잡고 자리를 잡아 연인(배우자)를 만나고 연애를, 사랑을 하고 자기의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싶은 강렬한, 생의 가장 근본적이고 본원적인 희망과 열망들의 감정을 다만 “닭다리를 뜯으”면서 “값싼 연애”라고 애서 “혐오”하고 덮어두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암울하고 막막했던 “동굴” 같은 “골목”에 정말로 겨울이라는 계절이 오면, 폐쇄되고 소통 없는 골목은 더욱 “문을 닫”은 채로 “고요보다 더 고요해지는” 밀폐의 장을 이루는데, 간혹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인기척에” 조금쯤 위안을 받으며 저편에도 누군가 나처럼 답답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구나, 라는 공감(共感)과 동감(同感)의 “얼굴 없는 가족이 되기도” 한다.
이 골목 이편저편, 곧 “전봇대, 우편함, 방문, 화장실”에는 “전단지가 골목의 각질”처럼 붙어있는데, 서정적 자아는 이를 두고 “골목의 뒤꿈치 같은 이들이/균형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굳어버린 희망의 자국”이라고 말한다. 노량진을 비롯한 전국의 수많은 고시촌을 머릿속에 그려보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 개중에서도 서민 연립주택들이 즐비한 골목길을 한 번이라도 걸어본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전봇대며, 우편함, 방문, 화장실 등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전단지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각종 구인광고, 구직광고, 과외학생 구함, 원룸 있음, 투룸 있음, 쓰리룸 있음, 하숙생 구함, 9급 공무원 ․ 고시반 운영 등, 온갖 청춘들의 우울하고 얼룩진, 그러면서도 끝내 떨칠 수 없는 희망의 마지막 한 자락과도 같은 “전단지”를 이 시의 주체는 “골목의 각질”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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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꿈을 꾸고 엄마는 날 낳았다 흰 꿈, 엄마는 치마폭에 날 쓸어 담았다 커다란 모시나비, 손끝에 잡혔다가 분가루 묻어나갔다 날개 끝에 고인 몇 점 물방울무늬, 방문 밖으로 날았다 돌담에 피는 씀바귀꽃 그늘을 옮겨다녔다 나비 날개엔 먼지가 끼지 않았다 한 꿈, 계단 입구에서 두 날개 맞접고 오래 기도하고 있었다 환한 꿈, 나는 오래전 그녀의 골반을 통과한 나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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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음파상 골반뼈는 하얀 나비 같았죠 그녀의 골반뼈에 종양이 생겼을 때 보았던 그 나비, 그러니까 그녀의 꺼먼 엉덩이살 안에 나비 날개가 굳어 있었던 거죠 나는 잘 벌어지지 않는 날개 사이로 미끄러져 나왔던 거죠 나도 작은 나비모양 엉덩이를 달고 나왔던 거죠 그러니까 그녀가 힘겹게 좌판에 쪼그리고 있었을 때, 날품팔이, 품앗이 할 때 그녀 속의 나비가 조금씩 앓고 있었던 거죠. 이 지상 마지막까지 날고 있을 나비, 그러니까 내 속을 빠져나간 어린 나비는 지금 내 앞에서 폴짝폴짝 날아오르고 있는데요


2010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석류화 시인의 시「그녀의 골반」은 ‘비교적 쉬운 시’로 읽힐 수 있는 시편이다. 쉬운 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려운 시도 아니고 왜 ‘비교적 쉬운 시’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시「그녀의 골반」은 일반적인 운문 형태의 시, 그러니까 행과 연으로 나누어진 시로 읽을 시에는 작품이해에 별반 어려움은 없다. 1절에서는 엄마가 꾼 태몽을 중심배경으로 하여 엄마의 시선으로 서정적 자아가 태어나기 이전의 상황을 환상적이고 몽환적으로 그려냈으며, 2절에서는 서정적 자아가 산부인과에서 초음파로 그녀가 잉태한 그녀 자신의 태아와 그 태아가 빠져나올 자기의 골반을 바라보며 시를 서술하고 있다는 것을 읽는 이는 어렵지 않게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일반적인 운문시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산문시처럼 행과 연을 붙여서 서술하고 있는데 시 구절의 끝에 구두점을 찍지 않고 그대로 이어붙임으로써, 2절의 마지막 “그녀 속의 나비가 조금씩 앓고 있었던 거죠 이 지상 마지막까지 날고 있을 나비, 그러니까 내 속을 빠져나간 어린 나비는 지금 내 앞에서 폴짝폴짝 날아오르고 있는데요”에서는 “그녀 속의 나비”와 “내 속을 빠져나간 어린 나비”가 한데 묶여있어 한 번에 명확하게 잘 이해되지 않고 외려 혼동을 부름으로써 독해에 어려움을 갖게 한다. 이를,


그녀 속의 나비가 조금씩 앓고 있었던 거죠

이 지상 마지막까지 날고 있을 나비,
그러니까 내 속을 빠져나간 어린 나비는
지금 내 앞에서
폴짝폴짝
날아오르고 있는데요


와 같이 바꿔 읽을 시에는, 연과 연의 분리로 인한 시적 서술 및 대상의 변화를 전제하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그녀 속의 나비”는 화자 자신이고 “어린 나비”는 시적 화자가 낳은 그의 아이라는 것을 독자는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산문시의 형태보다는 운문시의 형태로 형상화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가진 채로 석류화 시인의「그녀의 골반」을 읽어보면, 시의 제1절은 서정적 자아가 태어나기 이전, 어머니가 꾼 자신의 태몽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 태몽의 배경에는 ‘흰 꿈’, ‘한 꿈’, ‘환한 꿈’ 등 세 가지의 꿈이 겹치고 포개진다. ‘나비’로 은유(Metapher)되는 ‘나’는 엄마의 치마폭이나 손끝에 쉬이 잡히지 않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다 간절한 기도 끝에 엄마의 골반을 통과하여 세상 빛을 보게 된다. “초음파상 골반뼈는 하얀 나비 같았죠”로 시작되는 제2절을 보면 서정적 자아 자신도 지금 임신을 하여 산부인과에서 초음파 검진을 받고 있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그 “골반뼈는 하얀 나비 같았”다고 서정적 자아는 말하는데, 이는 자아의 골반을 타고 나비로 상징되는 아이, 새 생명이 빠져나갈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녀의 골반뼈에 종양이 생겼을 때 보았던 그 나비,”에서 ‘그녀’는 화자의 ‘엄마’를 의미하고 ‘그 나비’는 시적 화자 자신을 의미한다. 그리고 엄마의 골반뼈에 ‘종양’이 생겼을 때 그 나비를 보았다고 표현한 이유는, 화자 자신을 엄마에게 생겨난 ‘종양’ — 악성 종양일 거다 — 으로 여기면서 엄마의 인생에 짐과 부담이 되는 자기를 ‘종양’으로 표현한 것이다. 화자의 엄마가 “힘겹게 좌판에 쪼그리고” “날품팔이, 품앗이” 등을 하며 힘겹고 고된 생활을 해나가는 동안에도 엄마의 뱃속, 골반 근처에서 화자는 “조금씩 앓”으면서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화자 자신도 ‘나비’로 상징되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고 그 아이, 화자에게는 “이 지상 마지막까지” 훨훨 날아갈 ‘나비’로 보이는, 자신의 속을 빠져나간 아이가 지금 화자 앞에서 “폴짝폴짝 날아오르고” 성장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하늘은 별을 출산해 놓고 천, 천, 히 잠드네

둥근 시간을 돌아 나에게 손님이 찾아왔어 동구나무처럼 서 있다가 숨 찾아 우주를 떠돌던 시선은 나를 더듬기 시작하네 씽끗, 웃다 달아나 종이 인형과 가볍게 탭댄스를 추지

그들은 의자며 침대 매트리스를 옮기고 가끔, 열쇠를 집어삼켜 버리지 그럴 때마다 나는 침대 밑에서 울곤 해 스스로 문이 열리거나 노크 소리가 들릴 때 화장실 문은 물큰물큰 삐걱대며 겁을 주기도 해 과대망상은 공중으로 나를 번쩍 들어 올리지 끊임없이 눈앞에서 주변이 사라졌다 나타나고 조였다 풀어져

골치 아픈 그들의 소행에 시달리다 못해 어느 날, 광대를 찾아갔지 광대는 자신이 두꺼운 화장에 사육당하고 있다며 웃어야 할 시간에 울고 있었어

천장을 훑어 오르기 위해 어둠 속에서 그들은 그림자를 흔들고 있어

자연스럽게 때론 엉성하게

그러다 접시가 입을 쩌억 벌렸어

누워있던 골목들 일제히 제 넋을 출렁였지

붙어있던 그들은 홀가분하게 나를 떠났어

온가 소동 부리고 떠난 자리,

무성한 음모만 시끄럽게 남아있네


201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성은주 시인의 시「폴터가이스트」는 ‘어려운 시’다. 왜 어려운 시인가 딱히 말하지 않더라도 이 시를 읽고 나서 쉬운 시라는 생각이 들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먼저 시의 제목을 보면, 독일어인 ‘가이스트(Geist)’는 영어의 ‘ghost’에 해당하는 단어로 ‘령(靈)’, ‘정령(精靈)’, ‘유령(幽靈)’ 등을 의미한다. ‘불을 놓기 위해 쌓은 장작더미’라는 뜻의 독일어 단어 ‘폴터(Polter)’가 ‘가이스트’ 앞에 붙으면 ‘폴터가이스트(Poltergeist)’라는 복합명사가 만들어 지는데, 이는 ‘시끄러운 요괴(妖怪)’라는 뜻을 가진 독일어 단어 ‘클롶프가이스트(Klopfgeist)’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클롶프가이스트’의 어원인 독일어 동사 ‘klopfen’은 ‘여러 번 가볍게 두드리다, 치다, 두들겨서 잘게 부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흔히 접할 수 있는 국어나 영어로 된 시 제목도 아닌 낯선 외국어를 제목으로 가진, 안 그래도 무슨 내용인지 감도 잘 잡히지 않는 시를 만나게 되면, 보통의 독자는 시를 독해하는데 맞닿게 되는 어려움과 더불어 위축감까지 더해져, 어려운 시 앞에서 점점 작아지고 고뇌하다 어쩔 수 없이 해당 시 읽기를 포기하는 절차를 밟게 된다. 이 시 ‘폴터가이스트’는 그 좋은 예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해서 그 낯선 외국어 제목이 무슨 뜻을 가진 단어인지 먼저 알아보고 난 뒤 본격적인 시 읽기를 해보자는 의미에서 시인이 제목으로 취한 외국어 단어의 어원풀이부터 해본 것이다.
시의 1절은 낮이 가고 밤이 오는 정황을 “하늘은 별을 출산”한다는 감각적인 표현으로 제시한다. 그렇게 “하늘은 별을 출산해 놓고”는 “천, 천, 히 잠”의 세계로 빠져든다. 지상의 모든 것은 밤의 출현과 더불어 잠들게 되고, 이는 곧 꿈의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서정적 자아는 꿈속으로 빠져든다.
시의 2절과 3절은 서정적 자아의 꿈속 정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현실이 아닌 꿈 안의 상황묘사이기 때문에 리얼리티에 입각해서 이 절들을 해석할 필요는 없다. "둥근 시간을 돌아 나에게 손님이 찾아왔"다는 화자의 말로 2절은 시작하는데, 이 때 '손님'은 당연히 시끄러운 요괴, '폴터가이스트'들이다. 그들은 "씽끗, 웃다 달아나 종이 인형과 가볍게 탭댄스를 추"기도 하는 등 경쾌하고 활발한 몸짓과 행동으로 서정적 자아에게 다가온다.
2절에서 경쾌하게 등장한 '폴터가이스트'들은 3절에서 "의자며 침대 매트리스를 옮기"는 등 자아의 생활공간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들 몰래 자기만의 비밀 탈출구를 만들었던 서정적 자아는 재빨리 그 비밀 탈출구의 '열쇠'를 찾아들고 그리로 도망가려 하지만 사악한 요괴들은 "열쇠를 집어삼켜 버"린다. 서정적 자아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침대 밑에서 울곤"하는 일 뿐. 노이로제(Neurose)에 걸려버린 자아는 "스스로 문이 열리거나 노크 소리가 들릴 때"는 물론이거니와 "화장실 문"이 간혹 "물큰물큰 삐걱" 댈 때조차도 무한한 공포를 느낀다. 노이로제, 곧 "과대망상은 공중으로" 자아를 "번쩍 들어 올리"고, "끊임없이 눈앞에서 주변이 사라졌다 나타나고 조였다 풀어"지는 안타까운 상황 속에 자아는 갇힌다.
서정적 자아에게는 왜 2절과 3절에서와 같은 고통스런 밤과 잠, 꿈이 찾아오는 걸까. 고된 하루의 일과가 끝난 뒤의 귀가라는 것이 얼마나 달콤하고 평온한 것인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것이 아닌가. 내 집에서 다리 뻗고 발 뻗고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 힘들었던 하루의 막을 내리면서 새롭게 찾아올 내일의 아침을 기다리는 것은 또 얼마나 설레고 즐거운 것인지. 그러나 이 시「폴터가이스트」의 자아는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편안한 잠의 세계를 전혀 즐기지 못하고 있다. 편안한 잠을 못 즐기는 정도가 아니라, 잠에 이어 접어든 꿈의 세계에서는 아예 사악한 요괴들의 무차별적 공격과 소름끼치는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쫓기면서 유린당하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꿈을 억압된 욕망이나 압축, 전위나 표상화 등의 위장을 통해 자기를 충족시키려는 시도라고 생각했"다고는 하지만, 이 시의 서정적 자아에게 꿈은 다만 현실의 연장일 뿐이다. 아주 지독하고 끔찍하고 참혹한 현실의 지속일 뿐인 것이 바로 시 속에서 자아가 꾸는 꿈이다. 낮의 현실 속에서 자아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는 온갖 파편 같은 사건들과 인간관계들은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난 뒤, 밤의 꿈속에서조차도 사악한 요괴의 형상으로 '손님'처럼 나타나 자아를 괴롭히는 것이다. 서정적 자아는 잠을 자는 동안에도 편안할 수 없다. 비극적 테러만이 눈을 뜬 순간에도 눈을 감은 순간에도 자아에게 계속될 뿐.
"골치 아픈" 시끄러운 요괴들의 "소행에 시달리다 못해 어느 날," 서정적 자아인 '나'는 '광대'를 찾아간다. "광대는 자신이 두꺼운 화장에 사육당하고 있다며 웃어야 할 시간에 울고 있었"다. '광대'는 시 속에서 서정적 자아에게 동병상련(同病相憐)을 일으키는 대상이자 객관적 상관물이다. 4절 역시 앞선 2, 3절처럼 리얼리티에 입각해서 읽어서는 곤란하다. 꿈의 연속 혹은 꿈밖의 또 다른 환상으로 보아야 한다. '광대' 역시 "두꺼운 화장" 안에 갇혀서는 겉과 속이 다른 채로 "웃어야 할 시간에 울"어야 하는 숙명을 타고난 슬프고도 불행한 존재다.
시끄러운 요괴들은 "자연스럽게 때론 엉성하게" "천장을 훑어 오르기 위해 어둠 속에서" "그림자를 흔"드는 등 온갖 난장의 축제를 벌인다. 그 난장판의 한가운데로 튀어 오른 "접시가 입을 쩌억 벌렸"다. '접시'는 해, 태양을 상징하며 "접시가 입을 쩌억 벌"린 것은 날이 밝았음을 의미하고, 이어지는 8절의 "누워있던 골목들 일제히 제 넋을 출렁였지"는 분주한 이른 아침의 어수선한 풍경을 의미한다.
날이 차츰 밝아옴에 따라, 긴 밤 서정적 자아를 괴롭히고 공포에 몸부림치게 했던 시끄러운 요괴들(그들)은 "홀가분하게" 자아 곁을 떠나고, 이제 자아가 두려운 마음으로 밤새 시달린 자신의 눈꺼풀을 떠서 주위를 축축한 시선으로 둘러본다.
"온갖 소동 부리고 떠난 자리,"에는 "무성한 음모만 시끄럽게 남아있"다.
성은주 시인의 시「폴터가이스트」는 얼핏 상투적일 수도 있었을 시적 소재를 리얼리티에 입각한 시 전개가 아닌 1절부터 마지막 11절까지 '꿈속'이라는 환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그 꿈 안에 침입한 시끄러운 요괴들로 상징되는 일상의 폭력과 공포, 온갖 망동들을 극적으로 묘사하며 가장 편안한 안식의 장이어야 할 수면시간조차 또 다른 불행의 장소로 경험해야만 하는 서정적 자아의 고통과 노이로제를 빼어나게 형상화해내고 있다.

딱, 뚜껑을 따듯
오리의 목을 자르자 붉은 고무 대야에 더 붉은 피가 고인다

목이 잘린 줄도 모르고 두 발이 물갈퀴를 젓는다
습관의 힘으로 버티는 고통
곧 바닥날 안간힘
오리는 고무 대야의 벽을 타고 돈다

피를 밀어내는 저 피의 힘으로 한때 오리는 구름보다 높이 날았다
죽은 바람의 뼈를 고향으로 운구하거나
노을을 끌고 툰드라 지대를 횡단하기도 하였다

그런 날로 돌아가자고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더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피

날고 헤엄치고 걷게 하던 힘이 쏟아진다
숨과 울음이 오가던 구멍에서 비명처럼 쏟아진다

아니, 벌써 따뜻한 호수에 도착했나
발아래가 방금 전까지 제 안쪽을 흘러 다니던 뜨거운 기운인 줄 모르고
두 발은 계속 물갈퀴를 젓는데
조금씩 느려지는데

오래 쓴 연필처럼 뭉뚝한 부리가 붉은 호수에 떠 있는 흰 병을 바라본다
한때는 제 몸통이었던 물체를
붉은 잉크처럼 쏟아지는 내용물을 바라본다

길고 길었던 여정이 이처럼 간단히 요약된다니!

목 아래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발 담갔던 호수들을 차례로 떠올리는 오리는
목이 마르다
흰 병은 바닥난 듯 잠잠하지만
기울이면 그래도 몇 모금의 붉은 잉크가 더 쏟아질 것이다


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유병록 시인의 시「붉은 호수에 흰 병 하나」는 일단은 ‘쉬운 시’의 계열에 속할 것이다. 한 번만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에도 분석과 해설, 평론이 필요한 이유는 쉬운 시라 해도 이 시를 액면 그대로 읽고 넘어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며, 해당 시가 가진 시적 특성에 입각해서 작품을 읽고 해석을 해야 더 다채롭고 이채로운 감상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가 포함된 시적 계열의 특성으로 사물시(Dinggedicht)적 특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사물시란 “외부현실의 대상을 강렬하고 집중적인 언어로 재현하는 시”, “주관적 ․ 서정적 정조의 흐름을 그려 가는 시와는 반대로 대상의 객관적 묘사에 기초한 시”를 이름인데, 이 시는 사물시적 특성에 입각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시의 1절과 2절은 “딱, 뚜껑을 따듯” “오리의 목”이 잘리고, 그 “목이 잘린 줄도 모르고” 오리가 팔딱이는 동안 오리의 잘린 목에서부터 뿜어져 나간 피가 “고무 대야의 벽을 타고” 도는 상황을 징그러울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이 시에서 시적 화자가 꼼꼼하게 바라보면서 묘사하고 있는 시적 대상물은 일반적으로 식용을 위해 가금(家禽)된 집오리일 것이다. 물론 3절이 담고 있는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날 수 없는 집오리보다는 겨울철새인 청둥오리를 떠올리는 게 외려 나을 수도 있지만, 화려한 빛깔의 청둥오리보다는 약간은 때가 절은 흰색의 일반적인 집오리, 날 수 없는 오리의 모습을 그려보는 게 이 시의 정서나 분위기, 주제 등에 더 잘 부합된다는 생각이다.
3절에서 목이 잘린 오리는 분출하는 “피를 밀어내는 저 피의 힘으로 한때” “구름보다 높이 날았”고 “노을을 끌고 툰드라 지대를 횡단하기도 하였”던 시절을 그려보기도 한다. 이것은 정말 현실일까, 아니면 그저 꿈인 걸까. 그러나 그것이 실재했던 과거인지 아니면 동경(Sehnsucht)의 한 표현인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지금은 다만 “오래 쓴 연필처럼 뭉뚝한 부리가” “한때는 제 몸통이었던 물체를/붉은 잉크처럼 쏟아지는 내용물을 바라”볼 뿐인 상황인 거다. 이내 오리의 잘린 몸통, “흰 병은 바닥난 듯 잠잠”해지고 “기울이면 그래도 몇 모금의 붉은 잉크가 더 쏟아질 것이다”라는 담담한, 끔찍한 언술로 시인은 시를 끝맺는다.
이 시의 8절 “길고 길었던 여정이 이처럼 간단히 요약된다니!”는 사족이다. 굳이 한 줄의 시행을 독립적인 하나의 절로 나누어 서술할 만큼 시적 구성과 전개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8절을 삭제하고 한 번 시를 읽어보자. 작품의 의도를 추론함에 있어 어려움이 있는가? 굳이 시적 화자가, 곧 시인이 “길고 길었던 여정이 이처럼 간단히 요약된다니!”라고 탄식어린 어조를 내뱉지 않더라도 독자는 이 시의 해석을 무리 없이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상투적 해석이 불필요하게 첨가되었”다는 심사평은 8절을 두고 하는 평일 것이다. 차라리 시적 화자의 개인적 정서를 배제하고 사물시적 특성을 끝까지 유지했더라면 시 속에서 묘사되는 극적인 상황과 더불어 독자에게 더욱 강렬한 감동과 여운을 안길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너무 친절한 작가는 외려 불친절한 작가만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은 이 대목쯤에서 되짚어볼 수 있는 조언이다.
시적 화자가, 시인이 친절하게(?) 설명해 준대로 이 시는 길고 길었던 여정이 간단하게 요약되는 상황의 어처구니와 아쉬움을 그려낸 시다. 이 시를 오리의 일생에 한정하여 읽는 독자는 드물 것이다. 거개의 사물시가 그러하듯이 시인이 시적 화자, 시적 관찰자의 눈을 통해 대상물의 형태와 그가 처한 상황을 치밀하게, 예리하게 묘사하여 제시한다면, 독자는 묘사되는 사물을 통해 독자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삶과 인생살이 및 그 관계의 이면 등을 반추하고 반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시「붉은 호수에 흰 병 하나」는 그런 의미에서 생명 가진 모든 것들에 대한 외경심과 경각심을 일깨워준다는데 의미가 있다. 살아 꿈틀대는, 움직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이 ‘생명(生命)’이라고 하는 불변의 가치와 존엄을 가진 것이라면 하찮은 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하여, 아무리 하찮은 미물일지라도 그것 나름의 생명과 느낌이 있고, 아픔을 느낄 수도 통증에 몸부림을 칠 수도 있는 것인데, 함부로 목을 자르고(따고) 피를 분수처럼 분출케 하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독자는 그 무자비한 폭력의 손길과 잔인한 묘사에 진저리를 치면서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그동안의 생명에 대한 자기의 생각과 태도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아무리 지난날이 화려했을지라도 결국에는 종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생의 여정과 그 끝물에 관한 우울한 풍경의 한 단면을 마음 안에 떠올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3


앞선 2절에서 최근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던 시 5편에 대한 분석적 읽기를 시도해보았다. 한국일보와 문화일보, 대구매일신문과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5개 신문사의 2010년도 신춘문예 시 당선작들을 읽어보았는데, 2010년 신춘문예 당선작들 중에서 분석대상 시들을 선정했던 이유는 제일급의 시인과 평론가의 심사평을 등에 업고 '신춘문예 당선작'이라는 화려한 타이틀로 올해 막 등단한 시인들의 당선작을 가지고 평론을 한다는데 따른 부담감을 그 한 이유로 꼽을 수 있겠고, 재작년의 당선작들을 분석대상으로 다룬다는 것은 벌써 발표된 지 2년이 지나 지난해 당선작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이 읽히고 더 많은 분석적 비평의 대상이 되었을 시편들을 다시금 다루게 되는 꼴이 돼, 문학평론의 생명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현장성(actuality)'에 어긋난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작 일 년의 차이를 가지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작품선정의 적절성에 관한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을듯하다.
읽어본 시들 중에는 읽고 바로 이해하기에 ‘쉬운 시’도 있었고 거기에 반해 비교적 독해에 까다로움을 요구하는 ‘어려운 시’도 있었다. 먼저 읽은 두 편의 시, 김성태의「검은 구두」와 강윤미의「골목의 각질」이 전자에 속한다면 성은주의「폴터가이스트」는 후자에 속할 것이며, 석류화의「그녀의 골반」과 마지막으로 읽은 유병록의「붉은 호수에 흰 병 하나」는 ‘비교적 쉬운 시’로 전자와 후자의 가운데쯤에 자리할 것이다.
1절에서 내세운 논지를 거쳐 2절에서 읽은 작품들을 토대로 확인한 결과, 미래파 논쟁의 종언 이후 몇 년의 시간이 흘렀으나 아직도 여전히 읽기에 난해하고 많은 인내를 요구하는 어려운 시편이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있으며 그러한 시를 주(主)창작의 대상으로 삼는 시인의 등단 또한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 다른 한 쪽에서는 전통적인 시 작법과 형식을 바탕으로 기존의 서정시가 보여준 시세계를 계승하는 시편과 역시 이러한 시를 주요 창작의 대상으로 삼아 자신의 시세계를 펼쳐나갈 시인의 등단 또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곧 2000년대 이후의 국내의 몇몇 젊은 시인들의 난해한 시세계를 '미래파'라 처음 칭했고, 다시 '미래파는 없다'면서 미래파 종언을 선언하며 논쟁의 종지부를 찍었던 권혁웅 교수의 견해와는 달리, 이미 이 난해시편은 작금의 우리 시단의 한 전형을 구축했음을 알 수 있다. 서정옹호파의 입장을 차치하고서라도 역시나 저 난해시의 반대편에는 기존의 시세계를 대변하는 서정시의 지속적이고 일관된 창작과 그 생산 주체의 등단이 이어지고 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시(Gedicht)가 존재하는 한 서정시(Lyrik)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의 끄트머리에서, 나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미래파라는 난해한 시편들을 생산하는 시인들과 그들의 시작품에 관한 여러 논쟁이 '종언'이라는 선언 비슷한 형식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어려운 시와 쉬운 시, 곧 난해시와 서정시가 대립적으로 생산되고 유지되고 있는 최근의 신춘문예 등단작들을 살펴본 바, 앞으로도 우리 시단에 난해시는 난해시대로 옹호하고 비판하는 이가 있을 것이며 서정시는 서정시대로 옹호하고 비판하는 입장이 있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독자(Leser), 읽는 주체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극과극의 대립적인 입장에 고의적으로 위치하여 상대방의 견해에 대해 본인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제시하며, 하나의 결론에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그 과정에서의 여러 가지 양상과 면모를 제시함으로써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이러저러한 생각들을 펼칠 수 있게 하는 것이 논쟁이라면, 기왕의 미래파 논쟁에서 옹호론자들과 그 반대론자들이 보여주었던 비평문들은 상대방의 의견에 대한 경청과 존중보다는, 시문학비평에서의 비교 우위의 자리를 선점하려는 욕망과 기싸움의 다른 얼굴이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독자들은 외려 더 소외되고 밀려나게 되었던 건 아니었을까.
이즈음의 시가 너무 어려운 건 사실이다. 시를 전문적으로 읽고 분석하는 문학평론가나 연구자들에게까지 어렵게 다가오는 시들이라면 일반 독자들에게는 오죽할까. 그렇다면 이제는 기왕의 경우처럼 작금의 시대에 난해시의 생산이 옳으냐 그르냐 혹은 서정시가 당대성에서 동떨어졌다거나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논쟁은 한 쪽으로 잠깐 미루고, 네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의 입장을 벗어나 한 발 물러선 자리에서 이제 진정 시를 읽고 즐겨야할 독자들을 생각하며 현재 창작되고 있는 ‘지금―여기’의 시문학작품에 관한 비평문을 쓰는 건 어떨까.
시에 관해, 문학에 관해 문학평론가들보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지식과 식견을 가진 독자들에게 시가 어렵다면 그 시가 왜, 어떠한 연유로 어려운 것이며 그 어려운 시는 그 시대로 어디에서 어떻게 무슨 의미를 나름으로 지니고 있는가를 독자들에게 알려줘야 할 것이며 서정시는 서정시대로 어떻게 하면 읽는 주체들을 보다 더 풍요롭고 다채로운 시의 세계로 초대할 수 있을지 비평가들은 고민하고 강구해야 할 것이다.
이는 당연히, 문학평론가를 문학해설자의 위치로 끌어내리려는 의도가 아니다. “비평의 주요한 매력 가운데 하나는 치열한 상호논쟁의 전개에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잘못된 시작품과 시 경향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판적 비평의 시선과 입장을 견지하되, 그것이 독자를 망각한 논쟁 주체들의 입지 살리기가 아닌 늘 읽는 주체를 염두에 둔 보다 포용력 있고 발전성 있는 시 비평, 더 나아가 시 연구의 폭넓은 가능성과 열린 전망까지를 타진해보려는 의도에서 하는 말이다.
이때에도 문학평론가들이 독자에 대해, 또 문학작품에 대해 갖추어야 할 올바른 자세와 태도는 요구될 것이다.


비평가는 쾌도난마(快刀亂麻)하는 칼잡이도 아니며 우매한 대중을 교화하는 계몽의 교주도 아니다. 얽히고설킨 작품의 난맥상을 단칼에 잘라 내어 마구 풀어헤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오라기 하나 해치지 않고 온전히 풀어내야 하는 책무를 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독자의 한 사람이라는 입장에서 저만치 벗어나 있는 것도 아니다. 일개 독자로서 해석의 권한을 최대한 보장받고서 일반 독자보다는 좀 더 치밀한 해석을 하는 위치에 있을 뿐이다. 물론 작가의 하위에 종속되어 작가의 의도나 되풀이해서 써 내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작가와는 늘 상호 작용하면서 공동 창작하다는 자세로 비평의 장에 임해야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현재의 몇몇 평론가들, 그 중에서도 ― 이것은 본인들이 옹호하는 시의 경향이나 내용 및 특성 같은 것에 효과적으로 반응하기 위한 의도적인 방법의 하나일까? ― 미래파 옹호론자들의 경우 이러한 방식이 두드려져 보이는데, 그들의 문학평론을 보며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고 또한 수긍하기 어려웠던 것은 그들의 비평이 가진, 별반 쓰잘머리 없어 보이는 '현학성(衒學性)'이었다. 미래파 옹호론자들의 비평들 중 대개가 서양의 철학자의 이름이 한 번 이상씩은 꼭 나오고 그들의 철학이론이나 개념 등이 줄줄이 거론된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분석 대상이 되는 문학작품을 그 철학개념에 맞추어서 비평하기 시작한다. 온전한 문학작품읽기가 되기도 어렵거니와 무엇보다 이러한 현학성, 추상적 개념어의 남발은 그렇게 쓰여진 글을 읽는 이를 몹시도 고통스럽게 만든다. 편안하고 안정된 자세와 유려한 문체를 기반으로 하여 명쾌한 분석과 정감 있는 비평을 선보이며 읽는 이에게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문학비평의 한 정석(定石) — 앞선 1절에서 내가 열거한 대가급의 원로 문학평론가들의 비평문이 대부분 이러한 감동과 기쁨을 주는데 반해 — 과는 정반대의 지점에 서서, 읽는 이의 눈과 머리 모두에 극심한 피로와 괴로움을 안겨주는 이런 "'지식 잡화상'과 같은 비평가의 태도"는, 소모적 논쟁보다는 독자들에게 한 발 가깝게 다가가는 시 비평, 문학비평을 갈구하면서 없는 재능으로나마 힘겹게, 이런 되지도 않는 글을 그래도 어찌어찌 쓰고 있는 나를 무척이나 우울하고 서글프게 만든다. “차라리 이제부터 비평이라는 장르는 비평가들 중에서도 문학과 철학 등의 이론에 해박한 사람 정도가 되어야 겨우 읽을 수 있는 정도로 그 범주를 제한해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문학작품을 비평함에 있어 꼭,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 그냥저냥 좀 있어 보이고 싶은 욕구와 허세에서 하나의 장식품으로 철학자나 철학이론, 개념 등을 남발하는 평론가들이라면, "비평을 대화로 인식하"는 '대화적 비평론'을 모색하면서 "소설처럼 재미있게 읽히지는 않을지라도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설 수 있는 비평문"을 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중진 문학평론가의 비평관을 진지하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


비평을 대화로 인식하게 된 근본 이유는 비평이란 실제 행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비평대상인 작품과 비평가 사이에서 빚어지는 관계가 대화적 관계로 설정되어야 온전한 비평이 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문어화되어 있는 작품을 비평한다는 것은 구어적 상태로 작품을 회생시킴으로써 작품의 생명력을 환기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비평이 지닌 대화적 성격을 바탕으로 한 대화적인 비평 글쓰기를 하나의 비평양식이라 생각하여 이를 대화적 비평론으로 이름 지었습니다.


싸움의 양상을 띠는 논쟁의 비교 우위 점하기가 아닌, 서로의 다른 입장을 헤아리면서 독자들에게 보다 쉽고 친숙하게, 그러면서도 엄정함과 염결성을 잃지 않는 문학평론가들의 진정어린 노력과 정성 가득하게 써 내려간 충직한 한 편의 시문학 비평, 그것이 조금씩 조금씩 모이고 쌓여 건강한 한국 시단을 이루고, 이러한 비평의 역사와 역량이 축적되면 이 비평의 성과들은 현장비평을 떠나 문학연구의 범위 안으로 편입되어 더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연구결과를 낳을 것이며, 이리하여 이뤄지게 될 우리 시문학사는 향후 새롭게 전개될 문학사(Literaturgeschichte)에서 한껏 생생하고 조화로운 문학의 장(場)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1) 신형철,「2007 문화계 주목 이사람」4, 한국일보, 2007년 1월 4일
2) 김주연, 201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심사평 부분 
3) '서정옹호파'라는 명칭은 내가 붙인 것이다. 이미 잘 알려진 바대로 '미래파'라는 그럴싸한 명칭은 권혁웅 한양여전 교수가 2005년 계간『문예중앙』봄호에「미래파. 2005년, 젊은 시인들」이라는 제하에, 일군의 젊은 시인들을 한데 묶어 지칭한 표현이다. 이에 반해『서정의 미래와 비평의 윤리』,『생산과 소통의 시대를 위하여』등의 평론집에서 권혁웅과 이장욱을 비롯, 미래파 옹호론자들을 날카롭게 비판한 하상일 동의대 교수와 이와 같은 선상에 위치한 시 비평집『지독한 사랑』의 고명철 광운대 교수 등은 미래파와 그 옹호론자들에 맞서 기존의 서정을 바탕으로 한 '오래된 미래'를 주창한다. 이들을 지칭하는 마땅한 표현이 없기에, 이 글에서 나는 '미래파'의 반대선상에 위치한 이들을 '서정옹호파'라 부르기로 한다. 
4)장정일,「아담이 눈뜰 때」,『아담이 눈뜰 때』, 미학사, 1990, 9쪽
5)김영하,『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문학동네, 1996, 7쪽
6)하상일,「그래도 가장 ‘시적인 것’은 ‘서정’이다」,『생산과 소통의 시대를 위하여』, 신생, 2009, 315쪽
7)정훈,「창백한 서정」,『시의 역설과 비평의 진실』, 산지니, 2011, 64∼65쪽
8)이슈투데이 편집부,「감춰진 꿈의 진실」,『이슈&논술 1.0』 281호, 이슈투데이, 2007, 32쪽
9)김병옥 ․ 안삼환 ․ 안문영 엮음,『도이치문학 용어사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440∼441쪽
10)최동호 ․ 김혜순, 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평 부분
11)'미래파(Futurismus)'가 마리네티를 중심으로 전개된 1910년대 이탈리아의 급진적 문학운동을 가리키는 용어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12)이명원,「비평을 읽지 않는 몇 가지 이유」,『리토피아』2003년 가을호, 33쪽
13)장일구,「환원론의 오류를 경계함」,『작가세계』1997년 가을호, 401∼402쪽
14)이명원, 위의 글, 31쪽
15)하상일,「비평의 소통과 미래」,『서정의 미래와 비평의 윤리』, 실천문학사, 2007, 205〜206쪽
16)남송우,「책머리에」,『대화적 비평론의 모색』, 세종출판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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