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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은 근대도시가 아니다.

김의한 선임기자
- 4분 걸림 -

군산은 근대 시기에 일본인이 대거 몰려 들어오면서 만들어진 근대도시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인 것 같다. 요즘 군산시에서도 ‘근대문화도시, 군산’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일제시기에 만들어진 건축물을 정비하는 데 대대적인 지원과 예산을 아끼지 않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우리 민족이 삶을 영위했던 군산 본래의 모습은 잊어버리고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의 모습만을 ‘근대문화도시’라고 하면서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군산에 오기 전에 군산은 갈대만 나부끼는 한적한 어촌 마을에 불과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군산시청에서 발간한 ??군산시사??에서도 “개항 당시의 군산은 5, 6의 구릉의 기슭에 약 150여 채의 한옥이 산재하고 저지에는 조수가 드나들고 갈대가 무성한 습지였다.”라고 쓰고 있다. 이랬던 군산이 일제에 의해 근대도시로 변모하였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가 근대화를 이룩하였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전형인 것이다.
이러한 식민지 근대화론적인 군산 역사에 대한 인식은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고, 또 왜곡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실제 군산은 일본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적한 어촌이 아니었다. 군산은 조선후기에 우리나라 최대의 조운 담당 관청인 군산진이 있었던 곳이다. 군산에서 제 때에 조세미가 서울로 올라오지 않으면 한양 관리들에게 녹봉을 주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군산에는 조선전기에는 정3품 수군절도사가 관할하는 호남 수영이 있었고, 종3품 병마첨절제사가 관할하는 옥구진이 있었으며, 옥구 북쪽 진포에는 군산진까지 있었다. 한 지역에 이와 같이 수영과 진이 세 개씩이나 있었던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그리고 18세기 말에 만들어진 ??호구총수??에 의하면 군산에는 4,446호, 14,649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호적에 등재된 숫자이고, 타지에서 군산창에 와서 근무하는 군인과 노무자들까지 포함한다면 2만 명 이상이 군산에서 거주하였을 것이다. 1910년 일본인이 작성한 민적통계표에도 군산 인구는 21,830명으로 나와 있다. 이러한 군산이 일본인이 오기 전까지 150여 채의 한옥이 산재한, 인구 500여 명이 거주하는 한적한 어촌 마을에 불과하였다는 것은 완전히 거짓말이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보면 일본인들 자신이 구 군산진 관청을 허물고 그 자리에 영사관을 짓겠다는 기밀문서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일본인들의 거짓말을 오늘날 군산에서 그들의 식민사관적인 인식을 깨닫지 못하고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이다.
군산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신석기, 청동기 시대에 걸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군산대학교에서 자동차로 5분만 가면 세종 때 만들어진 그림같이 아름다운 옥구읍성의 터가 있고, 임피에는 임피읍성과 이방청인 노성당도 있다. 또 조선후기에 서울 장과 같이 시끌벅적하다는 경장(京場)도 있었고, 아이들을 가르치던 서당과 서원이 곳곳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본래의 모습은 완전히 망각해 버리고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지고 규정된 근대의 모습을 우리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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