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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김의한 선임기자
- 5분 걸림 -

만년필

                                 송찬호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 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의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 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 - 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 - 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 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필기구 중에서 만년필이란 게 있지요. 말 그대로 만년(萬年)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일회용 필기구와 달리 잉크를 재충전해서 오래 쓸 수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겁니다. 예전에는 졸업 또는 입학 선물로 주고받던 고급 필기구였는데 요즘에는 이 만년필을 쓰는 사람도 드물더군요. 그래도 펜촉이 종이를 긁는 느낌의 남다른 특별함은, 사용하는 사람들만이 아는 장점이랍니다.

이 작품은 이런 만년필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보는 데서 출발합니다. 펜으로 무엇인가를 이루겠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흔히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도 있지요. 여기서는 우선 만년필의 펜촉을 삽날에 비유하고 있네요. 우선 펜촉의 오목한 모양과 삽날의 유사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글을 쓰는 행위와 땅을 파고들거나 퍼담는 행위를 연관시켜서 나온 표현일 겁니다.

이어지는 시행들은 글쓰기의 여러 모습을 보여줍니다.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 두는 행위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상상력의 글쓰기를 연상시킵니다. 또한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은 허황된 수사의 글쓰기를 일컫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근엄한 장군의 수염”은 어느 권력자를 미화하는 글쓰기를,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 역시 어느 부자를 위한 글쓰기를 의미한다고 추정해볼 수 있지요. 이처럼 한때의 권력이나 돈에 휩쓸리는 글쓰기는 대체로 나중에 후회를 불러일으키게 마련이어서 나중에는 “공원묘지의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가끔식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게 하기도 하나 봅니다. 글 쓰는 일에 매달려 사는 지식인의 초라하고 나약한 자의식을 엿볼 수 있는 시행들입니다.

이 작품에 나오듯 누구에게나 “만년필 시대”라고 이름붙일 만한 시절이 있었겠지요. 그런데 지금 만년필은 책상서랍 속에서 뒹굴고 있습니다. 한때 글로 세상을 바꾸려던 패기와 열망, 그리고 그 꿈을 이루려 덤벼들었던 청춘과 질풍노도의 날들은, 그렇게 서랍 속의 만년필처럼 지나간 일인가 봅니다. 그러나 아직은 모르는 일이지요. 잉크의 늪에 사는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언젠가 다시 떨쳐 일어날 날이 있을지도.

강연호(시인, 원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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