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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의 寶庫, 군산

김의한 선임기자
- 5분 걸림 -

 인터넷 등 여러 매체를 통해 군산 여행에 관한 자료를 찾다보면 대부분 일제강점기 이후 중심으로 소개되어 있다. 언 듯 보면 군산은 마치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도시처럼 비춰지기 쉽다. 최근 진행되는 문화재와 관련된 대다수의 사업과 활동들 또한 일제강점기 문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난 일년동안 이 지면을 통해 우리 군산지역의 문화유적을 큰 틀에서 살펴보았 듯이 군산의 역사와 문화는 그렇게 간단히 형성된 것은 아니다. 좀더 자세히 군산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면 발디딜 틈이 없는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잔재처럼 웅장한 건물이나 건조물이 남아있지 않지만 우리가 딛고 있는 땅 아래, 물 아래에 수만, 수천, 수백년을 거쳐 발전해 온 군산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다. 택지개발과 도로개설 등 산업화에 의해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650여개 소가 넘는 유적이 군산지역에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바다 한가운데 무리진 섬들을 일컫던 ‘군산群山’이라는 지명 지명이 지금의 군산으로 옮겨지고, 그곳은 고군산古群山이 된 바다, 강, 땅이 어우러진 곳이 군산이다. 구석기시대부터 내흥동 금강가에 터를 잡고 석기를 만들어 수렵과 어로, 채집으로 살아갔던 군산의 첫 사람들이,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에는 강을 벗어나 바다로 섬으로 퍼져간 사실은 해안과 섬 곳곳에 즐비하게 분포되어 있는 패총과 생활유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월명산에서 우리 대학을 지나 옥구까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 서해와 육지의 바람막이 역할을 했던 나지막한 산줄기에는 패총, 집자리, 무덤 등이 발디딜 틈도 없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도 개간된 밭과 들판에는 그들이 남겨놓은 토기와 석기 등 수많은 유물이 산산히 부서진 채 산포되어 있어 무구한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군산지역의 선사문화는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 대학에 박물관이 개관되면서 군산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학술조사가 진행되었다. 초대 박물관장이신 이세현교수님을 비롯한 사학과 교수님들과 박물관 사람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해마다 하나의 지역을 선정하여 정밀조사를 실시하였고, 『群山市의 文化遺蹟』(1985)으로 조사결과를 정리하였다. 이후 국가사업으로 일환으로 전국에 있는 모든 유형문화재를 망라한 문화유적분포지도를 작성하는 사업에 우리 대학이 참여하였고, 『文化遺蹟分布地圖-群山市』(2001)를 통해 650여 개소의 문화유적이 정리되었다. 신발이 다 헤져 바닥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군산의 모든 곳곳을 직접 돌아다녀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발굴조사는 개발로 인한 유적이 없어질 곳에 대한 구제발굴로, 군산지역에서 진행된 대부분의 유적이 도로와 산업단지 부지에서 확인되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발굴조사는 군산역 부지의 내흥동유적(구석기), 군장국가 산업단지의 비응도동유적(신석기~청동기), 농업용수로구간의 신관동유적(원삼국~삼국), 서해안 고속도로구간의 남전․도암리․창오리유적(청동기~조선) 등으로, 이와같은 발굴조사가 없었다면 군산의 실제적인 문화상을 살피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개발행위가 아닌 순수한 학술조사로 우리 대학에서 진행한 군산 산월리고분군의 결과는 우리 군산지역이 삼국시대에 지리적 요충지였음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우리 대학 박물관의 주요 전시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와같이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얼이 담겨 있는 다양한 문화유적들이 군산지역 곳곳에, 심지어 군산 앞바다 깊은 곳까지 남아 있다. 구석기 이래 바다와 강, 땅을 적절히 활용한 역사가 남겨놓은 문화유산이 있었기에 오늘날 다시 주목받는 새만금의 도시 군산이 되지 않았을까?
우리나라 선사를 공부하고 전시와 교육을 통해 재생산해 내는 박물관 사람으로서 군산의 귀중한 문화재들을 어떻게 보존하고 활용해야 후대에 더욱 귀하게 쓰여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고민과 반성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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