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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도시, ‘군산’

김수현 기자
- 14분 걸림 -

선선한 가을을 지나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고 있다. 그전에 우리나라의 과거에도 이처럼 찬바람이 불던 시기가 있었다. 바로 ‘일제강점기’다. 일제강점기란 1910년 8월 국권피탈로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부터 8·15광복에 이르기까지 35년 동안 일제강점(强占)하의 식민 통치를 받았던 시기를 말한다. 그 시기의 일본은 조선총독부 설치, 일본정규군의 무력배치, 태형제도 실시, 독립운동 탄압, 토지약탈을 위한 토지조사사업. 민족말살을 위한 식민지교육, 회사령과 민족 산업의 파괴 등의 일을 저질렀다. 그 사건들은 우리 민족에게 크나큰 아픔으로 남아있다.

 

군산

일제강점기의 군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군산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부산, 원산, 인천, 목포, 진남포, 마산에 이어 1899년 5월 1일에 개항된 항구도시다. 다른 개항 항구와는 달리 오직 쌀 수출을 근간으로 하는 일본 상공인들의 경제적 중심지였다. 일본으로 유출되는 쌀의 양이 늘어날수록, 군산 지역 농민들의 삶은 힘들어져 갔다. 많은 쌀을 생산했지만 가격은 낮았고, 그 쌀들도 일본으로 유출되며 자신들이 소비할 수 있는 쌀의 양은 제한됐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민들 중국에서 저질의 잡곡을 수입하여 소비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또한 일본인 지주들의 소작권 이동과 고율 소작료 부가, 제반 비용 전가로 농민들은 토지에서 이탈하여 토막민(움집에서 사는 사람, 한때 한반도에 존재했던 일종의 빈민가)의 삶을 살아갔다. 일본의 쌀 부족을 보충했던 역사적 아픔이 군산에 서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군산은 수탈의 역사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 이후 무단 통치에 시달려온 조선의 민중들은 1919년 3월 1일 거족적인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1일부터 2개월에 걸쳐 전개된 만세 시위운동은 질적인 면이나 양적인 면에서도 우리나라 민족 운동사에 남을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물론 3·1 운동은 독립을 이루지 못했고, 군산지역의 3·1 운동도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일제의 헌병경찰에 의해 무참히 진압됐다. 그러나 3·1 운동의 정신은 상해 임시 정부의 광복 운동과 만주 독립군의 항일 무장 투쟁으로 계승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또한 군산의 3·1 운동은 전라북도 지역 중에서 제일 먼저 계획되고 실제로 벌어짐으로써 그 여파가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때의 운동 경험은 이후 군산 지역에서 벌어졌던 지역 사회 운동의 인적, 물적 토대를 제공했다. 1920년대 일제의 문화 정치 공간에서 청년 운동, 농민 운동 등 다양한 대중 운동이 전개됐다.

위에서 말한 일제강점기의 비극적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그 당시의 모습을 잊지 말아야한다. 그래서 군산에 남아있는 일제강점기의 문화유산을 소개하고자 한다.

▲동국사 대웅전의 외관 / 촬영 : 김수현 기자
▲동국사의 범종 / 촬영 : 김수현 기자

동국사

동국사는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본식 사찰이다. 강제합병 1년 전 1909년 6월 일본 조동종 승령 우치다 스님이 일즈통에서 금강선사란 이름의 포교소로 개창하고, 1913년에 현 위치로 옮겨와 대웅전과 요사를 신축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정부로 이관되었다가, 1955년 불교전북교당에서 인수하고 당시 전북종무원장 김남곡 스님께서 동국사로 개명하고 1970년 대한불교조계종 24교구 선운사에 증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 정방형 단층팔자지붕 홑처마 형식의 에도시대 건축 양식으로 외관이 화려하지 않으며 소박한 느낌을 준다. 지붕물매는 75도 급경사를 이루고, 건물 외벽에 미서기문이 많으며, 용마루는 일직선으로 전통한옥과는 대조를 이룬다. 2003년에 등록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됐다.

요사(승려들이 거처하는 방이 있는 집)는 몸채를 툇간으로 둘러싸는 일본 전통양식이고, 복도를 통해 법당과 요사가 연결되어있다. 사용된 목재는 모두 일본산 쓰기목이다. 범종은 1919년 일본 경도에서 주조하였고 창건주 및 개산, 시주자, 축원문이 음각되어 있다.

동국사는 우리나라 개화기와 근현대사의 역사를 증명하는 건축물로, 식민지배의 아픔을 확인할 수 있는 교육 자료로서 활용가치가 높다.

▲히로쓰 가옥의 외관 / 촬영 : 김수현 기자

히로쓰 가옥

2005년 국가등록문화재 제183호로 지정됐다. 히로쓰 가옥이 위치한 신흥동 일대는 일제강점기 군산시내 유지들이 거주하던 부유층 거주지역이다. 이곳에서 포목점을 운영하던 히로쓰 게이샤브로가 지은 주택이 히로쓰 가옥이다. 이후 (구)호남제분의 이용구 사장명의로 넘어가 오늘날까지 한국제분의 소유로 되어 있으며, 영화 '장군의 아들', '바람의 파이터', '타짜' 등 많은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이 주택에서 촬영되었다. 건물의 형태는 근세 일본 무가(武家)의 고급주택 양식을 띄고 있다. 목조 2층 주택으로, ‘ㄱ’자 모양으로 붙은 건물이 두 채 있고 두 건물 사이에 꾸며놓은 일본식 정원에는 큼직한 석등이 있다. 1층에는 온돌방, 부엌, 식당, 화장실 등이 있고 2층에는 일식 다다미방과 도코노마 등이 있어 일제강점기 일본인 지주의 생활양식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지붕과 외벽 마감, 내부, 일본식 정원 등이 건립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건축사적 의의가 크다.

▲부잔교의 모습 / 촬영 : 김수현 기자

부잔교

부잔교는 일본이 수탈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시설 중 하나이다. 조수 간만의 차가 커 큰 배들을 부두에 정박할 수 없자 수위에 따라 높이를 자동으로 조절할 수 있도록 일본인들이 부잔교를 설치했다. 이곳을 통해 1934년에만 200만 석의 쌀이 실려 갔다. 부잔교는 부두에서 폰툰(물에 뜨도록 만든 상자형의 부체)을 물에 띄우고 그 위에 철근콘크리트 ·강판 ·목재로 바닥을 깔아 여객의 승하선 ·화물의 적양(積揚)에 편하도록 만든 구조물이다. 폰툰을 해저에 체인 ·와이어 로프로 고정시키고 그 위에 설치한 간이부두로, 조석 간만의 차이가 큰 곳에서 많이 이용된다.

▲구 조선은행의 외관 / 촬영 : 김수현 기자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일제강점기 식민지 지배를 위한 대표적인 금융시설로서 1922년에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과 대륙의 경제 수단을 목적으로 일제가 세운 조선은행 군산지점으로 광복 후에는 한일은행 군산지점으로 사용됐다. 이후 상업 건축물로 사용되다가 근대 문화 중심 도시 조성 사업을 통해 전시 시설(군산근대건축관)로 활용되고 있다. 설계자는 일본인 건축가인 나카무라 요시헤이이며 조적조 2층 건물로 지은 함석판을 이은 모임지붕으로 처리하였다. 정면에 돌출 현관을 중심으로 평아치를 5개 세우고 양쪽에 각각 1개씩 반원형 아치를 뒀으며, 외벽 중간 보머리를 상징하는 화강석을 끼워 장식했다.

일제강점기 군산을 배경으로 한 채만식의 근대 소설 ‘탁류’에 나오기도 하는 등 군산의 근대사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의 외관 / 촬영 : 김수현 기자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

군산 지역 최초의 은행 건물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1907년에 건립되었다. 구 일본 제18은행은 일본 지방은행 중 열여덟 번째 생긴 은행으로 나가사키 주하치 은행이라고도 한다. 은행 본관 1동(400.09㎡), 2층 창고 1동, 2층 사무실 1동(81㎡)으로 구성됐다.

일제강점기 은행건축의 일반적인 양식으로 지어 외관이 폐쇄적이며, 부분적으로는 인조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현재 은행 본관 정면 출입구와 내부는 많이 개조된 상태이고, 수직창 상부의 반원 아치창 부분과 부속건물 2개 동은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지역에 남아 있는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구 세관 건물(구 군산세관 본관)과 함께 일제강점기 일본 사업가들의 한국 진출과 쌀 수탈, 미곡 반출, 토지 강매 등 일제 수탈사를 간직하고 있는 건물이다.

2008년 2월 28일 등록문화재 제372호 ‘구 나가사키(長岐)18은행 군산지점’으로 지정됐다가 2009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지금은 (주)대한통운이 소유하고 있고 군산시에서 관리한다. 현재 군산 근대 문화 도시 조성 사업을 통해 전시시설(근대미술관)로 수리 및 보수하여 활용하고 있다.

▲구 군산세관의 외관 / 촬영 : 김수현 기자

구 군산세관

군산항을 통해 드나들던 물품에 대해 세금을 거두는 세관이 있던 곳이다. 군산항을 개방한 조선은 광무 2년(1899) 인천세관 관할로 군산세관을 설치했으며, 1909년에는 인천세관 군산지사를 설립하고 1908년에 이 청사를 준공했다. 독일인이 설계한 이 건물은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을 수입하여 유럽 양식으로 건축됐는데, 한국은행 본점 건물과 같은 양식이다. 바깥벽은 붉은 벽돌이지만 내부는 목조로 건축했으며, 슬레이트와 동판으로 지붕을 올리고 그 위에 세 개의 뾰족한 탑을 세웠다. 이 건물은 건축사적 의미 외에, 곡창 지대인 호남지방에서 농민들의 쌀 등을 빼앗아 가던 일본 제국주의 상징으로서 우리나라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다.

▲근대역사박물관의 외관 / 촬영 : 김수현 기자

근대역사박물관

근대역사의 중심도시, 군산에 자리한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군산의 근대문화 및 해양문화를 주제로 하는 특화박물관이자 지역박물관으로 방문객들이 군산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역사는 미래가 된다’는 신조로 과거 무역항으로 해상물류유통의 중심지였던 옛 군산의 모습과 전국 최대의 근대문화자원을 전시하여 서해 물류유통의 천 년, 세계로 뻗어 가는 ‘국제 무역항 군산’의 모습을 보여준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전통적 물류유통도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던 군산시의 정체성 확인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고, 전국 최대의 근대문화유산을 소유한 군산시의 문화적 특징을 관광자원으로 홍보하고자 시민들의 열망을 모아 2011년 9월 30일 개관했다.

 

가까운 주말에 앞서 설명한 장소에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대한민국의 가장 큰 아픔이자, 내 조상들이 받은 아픔 혹은 고통…. 그 아픔의 역사를 찾아가는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매우 소중한 것이고, 역사를 공부하고 그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 국가는 없다. 역사는 존재하며, 그 역사가 아픔이든 아니든 기억해서 나아가 후세에 다시는 물려주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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